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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왕국 6, 8대 군주 დემეტრე | 디미트리오스 1세 | ||
제호 | 한국어 | 디미트리오스 1세 |
조지아어 | დემეტრე | |
라틴어 | Demetrius I | |
가족 | 다비트 4세(아버지) 아르메니아의 루수단(어머니) 바크탕(동생) 기오르기(동생) 루수단(누이) 타마르(누이) 카타(누이) 다비트 5세(장남) 기오르기 3세(차남) 루수단(장녀) 바그라티오니(삼녀) | |
생몰 년도 | 1093년 ~ 1156년 | |
재위 기간 | 1125년 1월 24일 ~ 1154년(1차 재위) 1155년 ~ 1156년(2차 재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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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아 왕국 6, 8대 군주. 재위 도중에 아들 다비트 5세에게 찬탈당했다가 복위했다.2. 생애
조지아 왕국 5대 군주 다비트 4세와 아르메니아의 루수단의 장남이다. 남자 형제로 바크탕, 기오르기가 있었고, 누이로 루수단, 타마르, 카타가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정복 전쟁에 참여해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는데, 특히 조지아 왕국군이 아랍을 상대로 완승을 거둔 1117년 시르반 전투와 1121년 디드고리 전투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1125년 1월 24일 무슬림을 정벌하기 위한 원정을 준비하던 아버지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그동안 다비트 4세에게 연이은 패배를 당했던 이웃 무슬림 통치자들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조지아를 공격했지만, 다비트 4세가 생전에 조지아군을 강력하게 구축한 데다 그 역시 뛰어난 지휘관이었기에 모조리 격퇴되었다. 1129년 또는 1130년, 그는 자신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시리반 토후국을 제압한 뒤 누이 루수단의 남편 미누히르 3세를 그곳의 지배자로 앉혔다. 이후 시르반은 조지아의 왕의 요구할 때마다 군대를 제공해야 했다. 1130년, 알라트의 술탄 샤 아문 쇼크멘 2세는 아니를 조지아로부터 빼앗기 위해 침공했다. 그는 이에 맞섰지만 다른 전선에서도 적이 준동하자 아버지 대부터 조지아와 협력한 이븐 마흐무드에게 아니를 양보해야 했다.
1139년, 그는 간자 토후국을 공격하여 타격을 입힌 뒤, 간자 시의 도시 성문을 조지아로 가져왔다. 그러나 무슬림들의 저항이 극심해서 도시와 주변 땅을 오랫동안 장악할 수 없었다. 간자는 이후에도 투르크 침략자들이 조지아로 쳐들어갈 때 전초기지로 이용되었다. 이무렵 이복형제 바크탕을 왕위에 옹립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자, 그는 음모자들을 체포해 모조리 처형하고 바크탕을 실명시킨 뒤 감옥에 보내 곧 죽게 했다.
1154년, 아니의 에미르 파크르 알딘 샤다드는 주군 살투크에게 딸을 아내로 삼고 싶으니 허락해달라고 청했으나 거부당했다. 이에 원한을 품은 그는 그와 비밀 동맹을 맺었다. 얼마 후, 살투크 2세가 아니로 이동하던 중 미리 매복하고 있던 조지아군의 습격으로 사로잡혔다. 살투크의 아들들이 10만 디나르를 제공하며 아버지를 풀어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살투크가 조지아와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한 뒤 풀어줬다.
그런데 조지아에 돌아온 그는 장남 다비트 5세에게 폐위당하고 가레자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다비트 5세는 6개월만에 사망했고, 그는 1155년에 다시 왕위에 올랐다. 이후 또다른 아들 기오르기 3세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한 뒤 가레하 수도원에 다시 들어가서 죽을 때까지 찬송가를 집필하다가 1156년 사망했다. 사후 젤라티 수도원에 묻혔고, 조지아 정교회로부터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축일은 5월 23일이다.
그는 알려지지 않은 아내에게서 두 아들과 두 딸을 낳았다. 장남 다비트 5세는 1154년 정변을 일으켜 아버지를 폐위시킨 뒤 왕위에 올랐으나 6개월만에 사망했다. 차남 기오르기 3세는 1156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장녀 루수단은 셀주크 제국 술탄 아흐마드 산자르의 아내였으며, 아흐마드 산자르가 죽은 뒤 조지아로 돌아왔고, 나중에 타마르 여왕이 즉위했을 때 섭정을 맡았다. 차녀 바그라티오니는 키예프 루스의 이자슬라프 2세와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