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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동로마 제국 로도스 섬 | |
아버지 | 마르티누스 |
어머니 | 마리아 |
남편 | 이라클리오스 |
자녀 | 이라클로나스 외 9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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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 이라클리오스 왕조의 아우구스타, 동로마 황제 이라클리오스의 황후.2. 생애
이라클리오스의 이복형제인 아버지 마르티누스와 어머니 마리아 사이의 딸로 출생했다. 그녀가 이라클리오스와 결혼하고 아우구스타 칭호를 받은 때가 언제인지는 현재까지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테오파네스는 612년 8월 13일 파비아 에우도키아 황후가 사망한 직후 결혼했다고 기록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 니키폴로스의 연대기에 따르면 이라클리오스가 아바르 족과 전쟁을 벌이던 도중인 620년대에 결혼하였다고 한다. 615년경에 발행된 동전에는 황제의 바로 옆에 황후가 왕관을 쓰고 있는 모습이 있는데, 일각에서는 이 여인은 마르티나가 아니라 에우도키아 황후의 딸 에피파니아라고 주장한다. 다만 이라클리오스가 에우도키아 황후 사망 직후 마르티나와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았더라도, 민중이 동전에 새겨진 여인이 마르티나라고 여길 정도로 깊은 관계였던 것 같다. 당시에 주조된 동전 중에는 황후의 그림이 망치로 파괴된 흔적이 남은 게 많다.이라클리오스와 마르티나의 결혼은 동로마 백성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삼촌과 조카의 결혼은 정교회 교리를 정면으로 위배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르지오는 이라클리오스에게 마르티나를 부인하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그러자 황제는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냈다.
"당신의 말은 매우 훌륭하오. 대제사장이자 친구로서, 당신은 의무를 충분히 수행하였소. 나머지는 짐에게 책임이 있소."
민중의 반응 역시 매우 좋지 않았고, 이라클리오스가 선호하는 녹색당도 경기장에서 야유를 퍼부었다. 또한 이라클리오스의 형과 마르티나의 삼촌 등 황실 가족도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하지만 황제는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고, 사산 왕조, 아자르 족, 게르만 족 등 외세의 침략으로 인해 나라가 멸망당하기 일보 직전인 상황에서 이런 문제로 계속 다툴 수는 없었기에, 세르지오 총대주교는 결국 결혼을 인정하고 마르티나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고 아우구스타 칭호를 수여했다. 이라클리오스와 마르티나는 사이가 매우 좋아 이라클로나스를 포함한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첫째 파비우스는 목이 마비되었고, 둘째 테오도시우스는 귀머거리였다. 이에 대해 민중은 신께서 근친상간을 한 대가를 치르게 하였다고 여겼다.
636년 아랍에서 이슬람의 폭풍이 일어나 제국의 동방 영토가 위험해지자, 이라클리오스는 이들을 막기 위해 시리아로 출정하여 안티오크에 자리잡았다. 이때 마르티나와 이라클로나스, 그리고 황태자 콘스탄티노스도 함께 했다. 그러나 그해 8월 동로마 제국군은 야르무크 전투에서 아랍군에게 완패하였고, 안티오크마저 위험해졌다. 이라클리오스는 참십자가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운송하게 한 뒤 가족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 그러나 보스포루스에 이르렀을 때, 중병에 걸려 꼼짝하기도 힘들었던 그는 바다에 대한 공포심이 생겨나 바다를 건널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는 히에라 궁전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고, 어서 귀환하시라는 수도 대표단의 건의도 듣지 않았다. 마르티나와 측근들은 황제가 도통 말을 듣지 않자 그를 속이기로 마음먹었다. 테오파네스에 따르면, 그들은 보스포루스에 많은 배로 가교를 놓고 양 옆으로 바다가 보이지 않도록 녹색 나뭇가지로 울타리를 엮었다고 한다. 이라클리오스는 마치 땅 위에서처럼 말을 타고 바다를 건넜다고 한다.
당시 이라클리오스의 후계자로는 613년부터 공동 황제가 된 콘스탄티노스가 있었다. 하지만 마르티나는 의붓아들인 그가 황위에 오른다면 자기가 낳은 자식들이 위험해지리라 여겼다. 그녀는 이라클리오스의 사생아 아탈라리쿠스와 조카 테오도로스와 함께 이라클로나스를 황제로 즉위시키는 음모를 꾸몄다. 마르티나는 남편을 압박했고, 이미 기력을 상실한 데다 폐병에 시달리는 콘스탄티노스를 걱정한 이라클리오스는 아내가 원하는 대로 해줬다. 이리하여 마르티나의 아들 이라클로나스는 638년 7월 콘스탄티노스와 함께 공동 황제가 되었다. 여기에 마르티나의 딸인 아우구스티나와 아나스타시아도 아우구스타의 칭호를 받았다.
641년 2월 11일, 이라클리오스가 숨을 거두었다. 이때 마르티나는 다 죽어가는 남편을 압박해서 콘스탄티노스와 이라클로나스와 함께 자신을 공동 통치자로 지정하는 유언장을 작성하게 했다. 이라클리오스가 사망한 뒤, 마르티나는 곧바로 피루스 총대주교와 원로원, 그리고 다른 고위 관리들을 원형 경기장에 불러서 공식 집회를 조직하고 유언장을 발표하면서, 자신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그 자리에 모인 군중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거부했다.
"당신은 황제의 어머니로서 영광을 누리게 되었지만, 그들은 우리의 황제이자 주인입니다. 여인이시여! 당신은 야만인이나 다른 외국 사절들을 궁궐에서 맞이하고 대화를 나눌 수 없습니다. 성모님께서 로마 제국이 그런 고비를 맞이하는 걸 막아주시길 바랍니다."
마르티나는 결국 황궁으로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콘스탄티노스 3세가 병에 걸렸다. 그는 칼케돈 궁전으로 가서 요양하였으나, 즉위한 지 석 달이 지난 641년 5월 25일에 사망했다. 그가 오래도록 앓았던 폐병이 악화되었거나 결핵에 걸린 게 사망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민중은 마르티나가 그를 독살했다고 의심했다. 여기에 마르티나와 밀접한 관계가 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피루스가 공범으로 지목되었다. 아무튼 콘스탄티노스 3세가 사망하면서, 15세의 이라클로나스가 단독 황제가 되었고, 마르티나는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마르티나는 콘스탄티노스 3세의 지지자들을 포섭하기 위해 막대한 기부금을 지불하였고, 회계관 필라그리우스를 포함해 대중에게 미움받던 관원들이 징벌되었다.
그러나 마르티나는 콘스탄티노스의 측근들을 모조리 유배보냈고, 인기 없는 단의론을 교회의 정식 교회로 지정했다. 성직자, 청색당, 녹색당, 원로원, 군대 등 모든 계층은 이에 분노하였고, 동부 총사령관인 아르메니아계 장군 발렌티노스 아르샤쿠니는 마르티나 타도를 외치며 군대를 일으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마르티나는 수도 수비를 강화하였지만, 발렌티노스는 칼케돈까지 진격하여 압박하였다. 여기에 콘스탄티노스의 아들들을 황제로 세우라는 시위가 연일 계속되었다. 결국 마르티나는 민중을 달래기 위해 콘스탄티노스 3세의 아들 콘스탄스 2세와 자신의 또다른 아들 다비드 티베리오스를 공동 황제로 즉위시켰다. 그러나 시위는 계속 이어졌고, 641년 9월 28일 성난 시민들이 아야 소피아에 침입하여 피루스 총대주교를 공격했다. 니키포로스는 다음날인 9월 29일 총대주교를 사임하고 카르타고로 달아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키던 군대마저 봉기하여 황궁을 삽시간에 장악했고, 원로원의 명령에 의해 마르티나와 이라클로나스가 체포되었다. 마르티나는 혀가 잘렸고, 이라클로나스와 다비드 티베리오스는 코가 베어졌다. 또다른 아들 마르티노스는 거세되었다. 그 후 마르티나와 자식들은 로도스 섬으로 유배되었고, 다시는 섬을 빠져나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