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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770년경 |
사망 | 미상 |
아버지 | 니키포로스 1세 |
형제자매 | 스타브라키오스 |
남편 | 미하일 1세 랑가베스 |
자녀 | 테오필락토스, 스타브라키오스, 니키타스, 고르고, 테오파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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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 니키포로스 왕조의 아우구스타, 동로마 황제 미하일 1세 랑가베스의 황후.2. 생애
770년경 니키포로스 1세의 딸로 출생했다. 어머니에 관한 정보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남동생으로 스타브라키오스가 있었다. 8세기 후반 에게 해의 동로마 제국함대 제독 테오필락토스 랑가베스의 아들 미하일 1세 랑가베스와 결혼했다. 802년 10월 31일 아버지가 이리니 여제를 몰아내고 황위에 오른 뒤, 그녀는 황실의 일원이 되었고 남편 역시 쿠로팔라테스 라는 고위 관직을 수여받았다.811년 5월, 니키포로스와 스타브라키오스는 휘하 장수들과 함께 불가리아 제1제국으로 쳐들어갔다. 1년에 걸쳐 철저한 준비를 한 제국군은 승승장구하며 불가리아를 밀어붙였다. 당황한 불가리아 황제 크룸은 강화를 요청했지만 이번 기회에 불가리아 제국을 아예 멸망시키고 싶었던 니키포로스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811년 7월 26일, 플리스카 근교의 좁은 협곡을 지나던 제국군은 불가리아군의 습격을 받았다. 니키포로스는 여러 장수들과 함께 전사했고 그의 해골은 크룸의 술잔으로 쓰였다. 한편 스타브라키오스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그 과정에서 척추가 골절되고 다리가 부러지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스타브라키오스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온 후 황제로 선포되었다. 하지만 부상이 워낙 심각해 오래 살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국가 비상 사태를 극복할 적임자로 니키포로스 1세의 사위인 미하일 1세 랑가베스를 추대하려 했다. 프로코피아도 동생에게 남편을 차기 황제로 세우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스타브라키오스는 누나의 요구를 묵살하고 아내 테오파노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니키포로스 등 정계의 핵심 인사들은 이리니에 이어 또다른 여제를 맞이할 생각이 없었다. 죽어가는 황제가 동의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사이, 811년 10월 2일에 미하일 1세 랑가베스가 황제가 되었다. 이후 원로원 의원들은 스타브라키오스를 강제로 수도원에 보내 삭발식을 거행하게 했다.
811년 10월 2일 미하일 1세는 황위에 올랐고, 프로코피아는 아우구스타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녀는 2년간 궁정을 이끌었으며,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테오필락토스, 스타브라키오스, 니키타스, 딸 고르고, 테오파노를 낳았다. 그러나 813년 6월 22일 남편이 불가리아군과의 전투에서 완패하면서 위기에 직면했다. 크룸은 동트라키아로 진격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목전에 두었다. 이로 인해 민심이 요동치자, 813년 7월 11일 미하일은 아르메니아인 레온 5세에게 황위를 물려주었다.[1] 테오파네스 콘티누토스에 따르면, 프로코피아는 남편의 퇴위를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소용 없었다고 한다.
결국 미하일 1세는 퇴위했고, 그녀는 수녀원으로 보내졌다. 장남 테오필락토스와 삼남 니키타스 역시 거세형에 처해진 뒤 수도원에 보내졌으며,[2] 두 딸 고르고와 테오파노는 수녀가 되었다. 프로코피아의 이후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니키타스는 이그나티오스로 개명하고 훗날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가 되었다.
[1] 사실 미하일이 불가리아군에게 패배한 건 레온 5세의 배신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레온 5세 문서 참조.[2] 차남 스타브라키오스는 아버지가 퇴위하기 전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