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4 14:28:27

리빌라

LIVILLA | 리빌라
이름 클라우디아 리비아 율리아
(Claudia Livia Julia)
애칭 리빌라(Livilla, "작은 리비아("little Livia"))
왕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출생 기원전 13년
로마제국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속주 루그두눔(오늘날의 프랑스 리옹)
사망 서기 31년(향년 44세)
로마제국 본국 이탈리아 로마, 소 안토니아 소유의 자택
직위 로마 공주(32년 기록말살형으로 박탈)
부모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아버지), 소 안토니아(어머니)
형제자매 게르마니쿠스(오빠), 클라우디우스 1세(동생)
배우자 가이우스 카이사르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자녀 율리아 리비아,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게르마니쿠스 게멜루스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가이우스 카이사르와의 짧은 결혼과 재혼2.3. 소 드루수스의 죽음과 세야누스와의 불륜2.4. 멈추지 않는 악행2.5. 세야누스의 몰락2.6. 최후
3. 평가

1. 개요

Livilla / CLAVDIA•LIVIA(고전 라틴어)

클라우디아 리비아 율리아 혹은 리빌라는 대 드루수스소 안토니아의 외동딸,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의 누나, 로마 제국의 황태자이자 장군 게르마니쿠스의 여동생이며, 로마 황제 칼리굴라의 고모다. 전체 이름에서 드러나듯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사람으로 부모를 통해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소 옥타비아의 피를 모두 이은 아우구스투스 직계 황족이다.

양할아버지이자 외종조부 아우구스투스, 친할머니 리비아 드루실라에게 큰 사랑을 받아, 가족들에게 애칭 '리빌라(작은 리비아)'로 불렸고, 이 이름이 통칭으로 잘 알려져 있다.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친조카이자 며느리로, 본래는 아우구스투스의 외손자, 양자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첫 남편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서기 4년 요절해, 아우구스투스의 결정에 따라 생전에 게르마니쿠스와 함께 티베리우스 사후의 제위를 잇기로 결정된 사촌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결혼했다.

어릴 적부터 사이가 매우 나빴던 대 아그리피나와의 경쟁심, 오빠 게르마니쿠스에 대한 증오, 아들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제위에 앉힐 야망으로 악랄한 간신이자 근위대장 세야누스와 불륜관계를 맺고, 남편 소 드루수스를 독살했다. 서기 31년 세야누스와 그 일당이 몰락한 뒤 남편을 독살하고, 오빠의 장남, 차남 몰락 과정에서 위증을 한 혐의가 드러나 시아버지 티베리우스 황제의 명령으로 친정으로 쫓겨난 뒤, 어머니 소 안토니아의 명령으로 굶어 죽었다.

살아생전 악행과 존속살해, 반역죄 협력, 간통 혐의로 서기 32년 원로원의 명령에 따라 기록말살형에 처해지고, 관련 영예와 특권이 모두 박탈됐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리빌라는 아우구스투스의 친아들로 의심받고 있는, 리비아 드루실라가 첫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차남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와, 아우구스투스의 친조카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딸 소 안토니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오빠 게르마니쿠스가 로마에서 태어난 것과 달리, 아버지가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속주의 루그두눔에서 갈리아 전역을 담당한 총독이자 게르마니아 전쟁 책임자로 근무 중일 때 태어났다. 따라서 로마와 이탈리아가 아닌 속주 도시에서 태어난 첫 황족이다. 그녀의 고향 집은 루그두눔에 위치한 총독 사저였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에서 드러나듯 아버지 성씨, 어머니의 외가 성씨의 여성형에 현직 아우구스타로 황제에 준하는 영예, 특권을 보유한 친할머니의 이름이 모두 결합되어 있다.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의 역사가, 원로원 의원 타키투스에 따르면, 리빌라는 성인이었을 때는 매우 아름다운 여성으로 유명했지만 어린 시절에는 다소 못생겼지만 매우 아름다운 여성으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어쨌든, 리빌라는 미녀였고 성인 이후 상당한 미인으로 유명했다.

리빌라는 일찍부터 집안 식구들에게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양조부이자 어머니의 외삼촌인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친할머니 리비아 드루실라는 그녀에게 손수 '작은 리비아'라는 뜻을 가진 리빌라라는 애칭을 지어주고, 이를 공개적으로 불렀다. 이때 아우구스투스, 리비아는 리빌라를 끼고 살았고, 늘 그녀에게는 일가 여성 중 가장 먼저 선택권과 모든 편의를 우선제공했다.

후일 시아버지가 되는 티베리우스 역시 평소 무뚝뚝하고 냉정한 성격, 잔정 없는 성격임에도, 이상하리만큼 리빌라를 친딸처럼 귀여워하고 아꼈다고 한다. 이런 배경 때문에 리빌라는 일찍이 아우구스투스의 외동딸 대 율리아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우구스투스의 외손자이자 후계자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약혼했다.

아우구스투스 부부가 손수 애칭을 지어주고, 황족 어른들이 끼고 살 정도로 아꼈던 만큼이나 집안 내에서도 비슷한 나이 대의 여자 황족들보다 높은 대접을 받았다. 리빌라는 대 율리아의 두 딸 소 율리아, 대 아그리피나보다 상석을 선사받았고, 아우구스투스 부부는 미래의 황제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결혼할 리빌라를 더 챙겼다. 이런 편애는 소 율리아가 외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와 사이가 나쁜 이유 중 하나가 됐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리빌라는 일찍부터 오빠 게르마니쿠스의 아내인 새언니이자 친척 대 아그리피나에게 적개심과 질투를 느꼈다고 한다. 이는 두 사람이 비슷한 연배인데다, 리빌라가 늘 오빠와 대 아그리피나를 라이벌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1] 실제 대 아그리피나는 로마 사회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안팎에서, 가정적이고 많은 아이들을 낳고 손수 키운 노력으로 많은 찬사를 받았다. 따라서 여러 학자들은 리빌라가 죽을 때까지 대 아그리피나를 유독 미워한 이유 중 하나가 이것 때문일 수 있다고 추정 중이다.

리빌라는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고결하다고 평가받은 오빠 게르마니쿠스, 후일 그녀의 두번째 남편이 될 소 드루수스와 달리, 어릴 적 아버지를 잃고 소아마비에 걸려 한 쪽 다리가 불편했던 친동생 클라우디우스를 멸시한 것으로도 당대부터 유명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의 누나 리빌라는 할머니 리비아 드루실라가 평소 클라우디우스의 말더듬이 증세와 불편한 한쪽 다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가문의 수치'라고 경멸한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일부러 할머니에게 누군가에게서 ‘훗날 자신의 동생이 황제가 될 것’이라고 한 얘기를 들었다고 떠들며 동생을 조롱했다. 이때 리비아는 그 예언에 크게 놀라 큰 소리로 “로마인들에게 그런 잔인하고 부당한 불행이 닥치지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까지 드렸다고 한다. 이 외에도 리빌라는 동생 클라우디우스를 감시하는 가정교사들에게 더 혹독하게 감시하라고 명하고 문자 그대로 어린 동생을 경멸했다. 따라서 후일의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에게 엄하게 대하며 노예와 해방노예에게 빌붙는 습관을 멀리하도록 한 할머니 리비아, 어머니 소 안토니아에게는 감사함과 그리움을 떠올림에도, 누나 리빌라와 어릴적 자기에게 체벌을 가하고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한 일부 가정교사를 악몽이었다고 평했다.

2.2. 가이우스 카이사르와의 짧은 결혼과 재혼

어릴 적부터 리빌라는 다른 남녀황족들보다 야심이 많았고, 자신의 혈통과 지위에 대한 자부심도 크고, 거만한 구석이 있는데다 자신이 낳을 아이들이 로마 황제 직위를 가져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따라서 기원전 1년, 리빌라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결혼했을 때부터 그녀는 장차 로마 공화국의 프린켑스이자 임페라토르가 될 가이우스 카이사르와의 약혼, 결혼에 만족했다. 이는 양조부 아우구스투스, 친조모 리비아의 생각도 비슷해, 두 사람의 결혼식은 호화롭고 화려하게 두 번에 걸쳐 진행됐다.

이 화려한 결혼식은 아우구스투스의 두 외손녀 소 율리아, 대 아그리피나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정도로 호화로웠는데, 이 결혼식 직후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동방의 아르메니아, 파르티아 문제 해결을 위해 곧바로 로마를 떠나 동방으로 떠났다. 이때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리빌라를 함께 데리고 가지 않아, 실제 결혼생활은 없다시피 했다. 더군다나 남편은 서기 4년 아르메니아에서 일어난 변고로 큰 부상을 입고 요절했다. 가이우스 카이사르 죽음에 아우구스투스는 크게 좌절했는데, 이는 리빌라도 비슷했다.

같은해인 서기 4년, 아우구스투스는 리빌라의 백부 티베리우스를 정식으로 입양하면서, 리빌라의 오빠 게르마니쿠스, 백부의 장남으로 사촌인 소 드루수스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후계구도를 공식화했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혈육 리빌라를 법적 손자 소 드루수스와 약혼 후 서기 4년 결혼시켰다. 리빌라의 새남펀 소 드루수스는 1살 위의 사촌오빠로 아우구스투스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리비아의 친손자였다. 그는 티베리우스가 은퇴 후 7년간 로도스 섬으로 갔을 당시부터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부부 손에서 자랐는데, 어릴 적부터 인품이 좋고 여러 자질이 있어 티베리우스와 게르마니쿠스, 아그리파 포스투무스가 카이사르 가문에 정식입양될 때 함께 입양됐다. 따라서 리빌라의 두번째 결혼은 가이우스 카이사르 요절 직후부터, 후계자로 데뷔한 게르마니쿠스의 우호세력 확보와 소 드루수스의 혈연상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정략 결혼이었다.

소 드루수스가 아우구스투스에게 죽은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가진 특권, 영예를 승계받고 아우구스투스 집무실에서 제왕교육을 받자 리빌라의 위치는 더욱 공고해졌다. 특히 오빠 게르마니쿠스와 남편 소 드루수스가 아우구스투스에게 함께 집정관에 취임할 법적 특권을 부여받고, 소 드루수스가 아우구스투스 옆에 앉아 원로원 우선 발언권과 질의권을 수여받자, 리빌라는 자연스레 차차기 황제의 아내 지위를 얻게 됐다. 이후 리빌라는 드루수스와의 사이에서 서기 7년, 첫 아이인 딸 율리아 리비아 카이사리스를 얻었다.

서기 14년,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 로마의 2대 황제가 되고 남편 소 드루수스가 원로원에 정식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손자이자 원로원을 이끌 차기 지도자로 소개되자 더 큰 관심을 받게 됐다.

2.3. 소 드루수스의 죽음과 세야누스와의 불륜

서기 19년, 리빌라는 로마 건국 이래 최초의 로마 최상류층 내 일란성 쌍둥이 형제 게르마니쿠스 게멜루스,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낳았다. 하지만 그녀와 라이벌 관계인 대 아그리피나는 이미 장성한 두 아들과 미성년인 가이우스(후일의 칼리굴라)를 두고 있었고, 딸도 세 명이나 있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 황제가 리빌라의 쌍둥이 형제 출산을 기념하는 주화를 발행하면서 이를 강조했음에도 리빌라는 대 아그리피나를 더욱 미워했다. 이런 상황에서 오빠 게르마니쿠스가 갑자기 요절했다.

오빠의 죽음, 쌍둥이 출산 이후, 남편 소 드루수스가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삼형제의 공식 보호자가 됐다. 이때 남편 소 드루수스는 진심으로 게르마니쿠스의 아이들을 보호하며 아버지 역할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쌍둥이가 태어나기 전, 혹은 그 직후부터 리빌라는 시아버지의 오른팔로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낸 근위대장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와 불륜 관계를 맺었다. 이는 후일 살아남은 아들 티베리우스 게멜루스가 소 드루수스의 친아들임에도 정통성에 타격을 입는 원인이 된다.

어쨌든 리빌라는 서기 19년부터 아들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티베리우스 이후 황제로 앉힐 요량으로 세야누스와 불륜을 맺고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남편 소 드루수스는 유일한 후계자로 집정관에 오르기 전부터 세야누스의 야심을 알고, 이미 정적 관계였다. 더욱이 그는 리빌라가 진짜 미워한 대 아그리피나가 게르마니쿠스 죽음 이후 티베리우스에게 대드는 것을 막고, 그녀가 소 드루수스에게 "악습에 빠져 있다"고 모함을 해도 도리어 그녀를 이해해주면서 티베리우스와 아그리파니 사이의 갈등을 중재했다. 그런데 이런 소 드루수스의 성숙한 태도는 리빌라 입장에선 못 마땅한 이유가 많았고, 이는 그녀가 남편을 은근히 경멸한 이유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드루수스는 티베리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올랐는데, 공공사업에서 벌어진 비리를 적발하고 효율적으로 국고를 관리하면서도 상하수도 사업 등 민감하고 어려운 행정 실무를 잘 처리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그가 원로원 안에서 벌어진 소장파와 원로파 사이의 갈등을 잘 중재하고 양측 모두에게 훌륭한 인품으로 존경받은 것은 원로원이 그를 높게 평가한 이유가 됐다. 그런데 소 드루수스는 이 시기, 아버지 티베리우스 면전에 대고 "세야누스는 위험인물이다."며 그를 쫓아낼 것을 주장했다. 이는 아버지 티베리우스에게 단 한 번도 보인 태도가 아니었고, 평소 소 드루수스는 예의있고 효심이 대단해 티베리우스는 크게 놀라 아들의 이런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또 소 드루수스는 리빌라가 대 아그리피나, 소 안토니아와 말싸움을 벌일 때마다 대 아그리피나와 소 안토니아 편을 들면서 황실 내 분란 차단에 모든 힘을 쏟았다. 이는 그가 아내와 세야누스의 불륜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리빌라가 조용해지려고 하면 아그리피나를 자극해 자꾸 싸움을 부추겼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 드루수스는 티베리우스 요청으로 원로원에게서 호민관 특권을 선사받았는데, 이때 원로원은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크게 신뢰해 만장일치로 이를 의결해주고 더 큰 권한을 주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세야누스와 원로원에서 심한 언쟁을 벌였는데, 얼마되지 않아 자택에서 식사 후 갑자기 죽었다. 이때가 서기 23년인데, 건강했던 소 드루수스의 죽음은 이 당시 급사 정도로만 알려졌다.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디오 카시우스 모두의 기록에 따르면 세야누스는 아우구스투스 생전 후계자로 지명돼 제왕교육을 받아온 드루수스를 크게 두려워 했고, 이 사람을 없애야 자신이 제위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해 리빌라와 공모해 독살했다고 한다. 이렇게 소 드루수스가 죽자, 티베리우스는 나폴리에 있다가 아예 카프레이아 섬에 만든 별궁에 들어가 은둔통치를 시작했다. 그러자 세상은 세야누스 일당의 것이 됐다.

서기 25년, 세야누스는 리빌라와 결혼하겠다며 티베리우스에게 정식으로 결혼을 요청했다. 이에 티베리우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강하게 거절하면서 도리어 아들이 보호해주던 게르마니쿠스의 두 아들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원로원에 공식 데뷔시켰다.

2.4. 멈추지 않는 악행

티베리우스가 세야누스, 리빌라의 재혼 요청을 단호히 거절한 이후 세야누스는 방법을 바꿔 티베리우스 외의 아우구스투스 남성 황족들의 씨를 완전히 말리는 방식으로 자신이 황제에 오르겠다고 결심한다. 이에 그는 티베리우스가 자신에게 준 권한을 이용해 고발과 날조, 협박 등을 통해 걸림돌이 되는 정적들을 제거하기 시작한다. 이때 그에게 가장 유력한 방해물로 타켓이 된 것은 당연히 게르마니쿠스가 남긴 두 아들과 게르마니쿠스의 미망인 대 아그리피나였다. 이들은 리빌라에게도 강력한 장애물이었고, 대 아그리피나는 숙적과 같은 존재라서 그녀는 세야누스의 계획에 적극 참여한다. 다행인 건, 당시 황제 티베리우스 역시 대 아그리피나를 무척 싫어했다는 점이다. 대 아그리피나는 본래 아우구스투스의 손녀라는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지만, 영리하고 절제력이 대단했다. 하지만 게르마니쿠스의 요절 직후, 티베리우스가 피소를 시켜 남편을 죽였다고 생각해 티베리우스를 원수로 여기고 있었다. 과거와 달리 우울하고 쉽게 화를 잘 냈고, 티베리우스라면 이를 갈았다. 따라서 그녀를 미워하는 이들은 늘어났는데, 리빌라는 이 틈을 노려 반 아그리피나 세력을 모아 지원사격을 했다.

세야누스는 아그리피나 모자를 몰락시키는 과정에서 아주 교활한 방법을 사용했다. 바로 네로 카이사르와 제위 경쟁을 하던 동생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부추겨세 모자를 이간질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리빌라와 함께 먼저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도와주는 척하면서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지지하는 파벌을 만들어 아그리피나와 네로 카이사르를 드루수스 카이사르와 갈라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티베리우스와 대 아그리피나 사이의 갈등을 이용해 아그리피나가 반역을 꾸미고 있다고 티베리우스를 속여 자신이 날조한 증거들을 믿게 했다. 이때 리빌라 역시 네로 카이사르와 결혼했지만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딸 율리아 리비아와 함께 황궁 안팎에서 분란을 계속 일으켰다. 이런 상황에서 세야누스의 요청인지, 아니면 티베리우스의 결정인지 몰라도 카프레아이에 머물던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가 내민 증거에 따라 서한을 통해 대 아그리피나와 그녀의 측근들을 반역죄로 고발했다. 이때 세야누스는 소 드루수스의 사위이자 게르마니쿠스의 장남 네로 카이사르를 반역에 참여한 공범으로 위조해 함께 반역죄로 고발했는데, 원로원에서는 황족인 이들 모자에 대한 처벌을 티베리우스가 확실히 정할 때까지 결정을 거부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다시 한 번 아그리피나 모자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고, 아그리피나와 네로 카이사르의 운명은 그대로 결정됐다.

어찌되었든 세야누스의 음모대로 아그리피나 모자는 포파이우스 사비누스와 엮여 '위험하고 거대한 음모'라는 이름 아래 고발됐고 몰락했다. 리빌라의 바램 그대로 그녀의 아들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는 제위에 한 발자국 더 나아갔고, 이제 남은 경쟁자는 드루수스 카이사르와 아직은 미성년자인 가이우스(칼리굴라), 그리고 신체적 장애로 군복무를 하지 못해 학자로 살고 있던 동생 클라우디우스 뿐이었다.

이렇게 네로 카이사르를 끝장낸 이후, 리빌라는 세야누스와 함께 이용가치가 다한 게르마니쿠스의 둘째 아들 드루수스 카이사르마저 말도 안 되는 사건을 만들고 위조해 제거한다. 물론 이 사건을 벌이기 전, 세야누스는 드루수스 카이사르와 대 드루수스 일가의 보호막 역할을 할 이들을 하나씩 제거하거나 그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다. 디오에 따르면,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의 신임을 얻고자, 또 티베리우스가 자신의 전처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 결혼한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갈루스를 좋게 생각하지 않음을 알고 갈루스 숙청 작전을 세워 갈루스와 그 친구 시리아쿠스를 모두 제거했다고 한다. 갈루스는 평소 세야누스의 야심을 알고, 그를 위험인물로 규정했는데, 세야누스는 이를 교묘하게 바꿔,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의 남편 갈루스가 마치 티베리우스와 세야누스의 우정을 경멸하고 질투하고 있다는 식으로 보고했다. 카프리 섬의 별궁 안에 있던 티베리우스는 애당초 갈루스가 자신의 전처와 재혼한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아서 이를 철석같이 믿는다. 따라서 세야누스의 요구에 따라 갈루스 숙청에 동의함에도, 겉으로는 그렇지 않는 듯 서신을 보냈다. 그리고 이를 신호로 갈루스 제거를 위해, 세야누스는 갈루스를 로마에 있던 티베리우스의 집에서 열린 연회에 초대해, 우정의 잔을 나눠 마시며 서약한 다음, 그를 체포해 원로원 안에서 유죄를 내리고 집정관을 보내 결박 후 사형에 처하게 했다.

이때 갈루스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의 반역죄 개정으로 불경죄가 명확한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 받았다. 하지만 이때 티베리우스는 본인은 전혀 이 사건을 몰랐다는 듯 서한을 보내면서, "로마 시민은 정당하게 자기변호의 기회를 얻고, 판결은 그 내막을 알아야 한다"고 의견을 밝히고 갈루스를 보호해주겠다면서 그를 카프리 섬으로 데리고 오라고 지시했다. 이에 원로원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갈루스를 황제 옆으로 보내는데, 이때 티베리우스의 명령에 따라 갈루스는 아주 끔찍한 일을 경험하면서 카프리섬으로 끌려가 상고심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디오는 이 사건에 관해 티베리우스가 악감정을 가지고 연적 갈루스에게 혹독한 조치를 취하게 했다고 말한다. 갈루스는 노예, 변호사 등도 대동하지 못하고 포승줄에 묶어 두 눈은 가려진 채, 로마에서 나폴리를 거쳐 카프리까지 음식도, 물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는 고통에 시달렸다. 더 끔찍한 것은 티베리우스의 명령인지 세야누스의 지시인지 몰라도, 갈루스가 죽으려고 해도 살 수 있을 정도의 음식, 물이 제공되어 숨이 붙은 채 티베리우스 앞으로 끌려갔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갈루스가 죽은 뒤, 로마에 있던 시리아쿠스도 세야누스의 공작과 티베리우스의 명령으로 "너는 반역자 갈루스와 친구이며, 불경죄를 방치했다"는 이유로 똑같이 유죄를 선고받고 죽임을 당했다.

이렇게 갈루스, 시리아쿠스가 죽자, 리빌라는 세야누스와 공모해 보호막이 완전히 사라진, 티베리우스의 후계자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제거할 준비에 들어간다. 당시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형과 함께 처음으로 원로원에 공식 후계자로 소개된 이후 복점관 등을 지내면서 평가가 괜찮았기에 두 사람 모두에게는 나름 우호적이더라도 반드시 제거할 대상이었다. 이때 세야누스는 겉으로는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차기 황제로 밀어주며 그를 가장 후원하는 측근인 척하면서, 티베리우스의 아들인 드루수스를 독살했을 때와 똑같이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아내 아이밀리아 레피다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불륜관계를 맺었다.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아내인 아이밀리아 레피다는 부주의한 여성인데다, 사치스럽고 정상적이라면 드루수스 카이사르와는 결혼할 수 없지만 운 좋게 결혼하게 된 귀족 집안 재원이라서 남편을 너무 쉽게 배신했다. 따라서 그녀는 세야누스, 리빌라의 계획대로 남편 드루수스 카이사르와 자주 충돌을 일으켰고, 자신의 남편이 30년 억울하게 체포될 당시 음모임을 알고 있음에도 뻔뻔하게 남편을 공격했다.[2]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후계자로 능력이 출중하고, 본인에게 순종적인 종손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인격적, 사적으로 말도 안 되는 스캔들을 벌일 리 없다며 판결을 유보케 했다. 이에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를 완전히 속이기 위해, 유능하나 잔혹한 수사관 카시우스 세베루스를 포섭하고, 리빌라는 자신의 딸 율리아 리비아를 속여(또는 설득해) 자신들의 편으로 만든다. 이후 세 사람은 카시우스 세베루스와 함께 증거를 위조해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공격한다. 저녁에 자고 있다가 갑자기 체포된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법정 안에서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아내와 황실 두 여인에 더해 악랄한 카시우스 세베루스까지 공격하자 버틸 재간이 없었다. 더욱이 로마에는 티베리우스가 없어 그를 보호해줄 사람도 없고, 믿었던 아내마저 뻔뻔하게 그에게 위증된 내용을 그대로 인정하며 공격하자 운명은 그대로 결정나고 만다. 따라서 드루수스 카아사르는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황궁 지하실로 끌려가 유폐된다.

이렇게 세야누스는 리빌라와 함께 모두의 장애물인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파멸시켰다. 하지만 서기 30년, 아직 남은 장애물은 두 명이나 더 있었다. 그중 한명은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동생으로 얼마 안 있으면 성년식을 가질, 게르마니쿠스와 대 아그리피나의 막내아들 가이우스였다. 후일 칼리굴라로 유명한 가이우스 왕자는 당시 리비아 드루실라가 죽어, 로마 안에서 그를 보호해줄 인사는 아무도 없었다. 또 다른 사람은 리빌라의 어머니로 가이우스의 할머니이며 유일한 보호자인 소 안토니아였다. 소 안토니아는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이며 안토니우스의 딸로, 가이우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을 보호하기 위해 움직인다면 가공할 만한 위험인물이 될 존재였다.

2.5. 세야누스의 몰락

티베리우스는 후계자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체포됐다는 소식을 전달 받았을 때부터 분명하게 드루수스 카이사르 사건을 유보케 했고, 이를 끊임없이 의심했다. 그래서 상황을 지켜보면서 세야누스의 속셈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본능적인 촉은 티베리우스의 동생 대 드루수스의 아내로 리빌라의 어머니 소 안토니아가 "세야누스는 위험한 인물이다. 우리 가족을 도와달라."고 요청한 편지가 그에게 전달된 순간부터 확신이 됐다.

소 안토니아는 로마에서 세야누스에게 감시당하는 와중에 마지막 남은 손자 가이우스(칼리굴라)를 지키기 위해 분투 중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은밀하게 자신과 남편이 일찍부터 믿었던 대략 37살 정도의 그리스인 노예 팔라스를 카프레이아 섬으로 보냈다. 이때 그녀는 손수 편지를 작성해, 자신의 남편과 장남이 남긴 유일한 친혈육을 살려달라고 간곡히 호소했다. 제수씨 안토니아의 편지 내용이 워낙 급박했고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고발과 유폐 과정에도 의문이 많았기에, 티베리우스는 팔라스를 칭찬한 뒤, 서둘러 가이우스를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였다.[3] 이후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 일당 사냥을 결심하고 움직인다.

프라이토리아니 전체를 직접 움직일 수 있던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가 임페라토르라고 해도 쉽게 제거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인물이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일단 세야누스를 자신의 동료 집정관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그를 찍어내기 위한 준비공작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관습으로 집정관 가운데 한명은 로마에 반드시 머물러야 하는데, 티베리우스는 카프리에 틀어박혀 있으므로 세야누스는 발이 로마에 묶여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세야누스는 그때까지 티베리우스에게 전달되는 서신, 면회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로마에 발이 묶이자 이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로인해 새로운 정보를 손에 넣은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의 음모를 확신하고 그를 찍어낼 결심을 하게 된다.

거기다 세야누스의 부하의 밀고까지 더해져 그의 반역은 완벽히 드러나지만, 티베리우스는 능청스럽게도 겉으로는 여전히 그를 신뢰하는 척을 하면서 프로콘술 명령권까지 쥐어주며 호민관 특권을 제외한 모든 권한을 갖게 하였다. 그리고 마치 자신이 이제 세야누스에게 후계를 양도하려는 것처럼 돌연 집정관을 사임하는데, 집정관은 공동 사임이므로 세야누스도 자동으로 사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야누스가 이를 의심하기도 전에 나이비우스 수토리우스 마크로를 세야누스 대신 근위대장에 임명하는데, 이때 티베리우스의 행동은 아주 신중했고 내전 당시의 젊은 아우구스투스와 비슷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마크로에게 도움을 구한다고 말하며 그가 세야누스를 제거하기 위한 도구용이 아닌 것을 간접적으로 약속했으며, "세야누스를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말했다.

또 황제는 갑자기 생각을 바꿨다면서 세야누스에게 리빌라와 결혼할 기회를 선사하겠다고 의견까지 밝힌다. 이렇게 되자 세야누스는 황제가 될 것이라고 여겼고, 리빌라 역시 세야누스가 제위에 오르면 자신이 권력을 쥐고 자신의 아들이 차기 황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모두 티베리우스의 연기였고,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과거 정적을 가장 완벽하게 파멸시키는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티베리우스의 서신을 가지고 로마에 도착한 마크로는 티베리우스가 만든 각본 아래 행동했다. 먼저 그는 세야누스에게 근위대장에서 해임되었음을 알리며 동시에 내일 원로원에서 세야누스에게 호민관 특권이 주어진다고 알려주었다. 마지막 남은 권한인 호민관 특권을 준다는 것은 곧 세야누스를 차기 황제로 지명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에[4] 세야누스는 매우 기뻐하면서 자신이 티베리우스의 덫에 걸린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리하여 다음날, 세야누스는 당당하게 원로원에 출석하였다. 그리고 티베리우스의 서한을 전달받은 집정관 레굴루스는 낭독을 시작했다. 이 티베리우스의 서한은 처음에는 시시한 국정 문제를 줄줄히 늘어놓으며 시간을 끌도록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사이 신임 근위대장 마크로는 거액의 하사금을 미끼로 근위대를 장악해두고, 소방대장 라코는 부하들을 팔라티누스 주변에 배치하여 봉쇄, 근위대의 무력 발동에 대응하였다.

이 즈음에서 레굴루스가 낭독하는 서한도 세야누스 파의 의원들을 비난하는 것을 시작으로, 서서히 세야누스 본인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변해갔다. 이에 낭독이 시작될 때 세야누스 주변에서 아부와 아첨을 하던 의원들은 슬금슬금 세야누스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티베리우스의 서한은 세야누스에게 티베리우스 자신이 고발자가 되어 국가반역죄를 선고하고, 그 증거를 나열하였으며, 원로원에게 세야누스를 즉시 처형할 것을 요청하는 것으로 끝맺어졌다.

낭독 직후 원로원은 환호했으며, 황제가 될 기대감에 부풀어 있던 세야누스는 갑작스러운 상황변화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자신의 이름을 3번이나 부르는 것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 세야누스는 반항도 하지 못하고 구속되었으며 바로 그날 밤 교수형에 처해졌다.

2.6. 최후

세야누스 제거 직후, 티베리우스와 원로원은 세야누스 일당 색출에 열을 올렸다. 따라서 매일 같이 고소장이 접수되고 세야누스 일당과 함께 한 이들은 본인 뿐만 아니라 그 가문 전체까지 연좌죄로 씨가 말랐다. 이런 상황에서 세야누스의 전처 아피카타가 자살을 강요당해 죽었다. 이때 아피카타는 자신의 아이들이 모두 살해되고 본인 집안까지 씨가 말랐다는 소리를 듣자 절망하면서 자살했는데, 고백할 것이 있다며 죽기 전 작성한 유서를 티베리우스 황제와 원로원에게 바쳤다. 이 유서 안에는 세야누스와 리빌라가 서기 19년 즈음부터 불륜관계였고 이들 부부의 이혼이 리빌라와 세야누스의 권력욕이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특히, 소 드루수스가 이들의 음모로 독살됐고 급사된 것으로 처리됐다고도 적혀 있었다.

이렇게 되니 원로원은 벌집 쑤시듯 온통 난리가 났고, 티베리우스 황제는 큰 충격을 받아 당장 재조사를 명령했다. 리빌라는 즉시 체포됐고, 드루수스의 술잔 담당관 리그두스와 리빌라, 소 드루수스의 주치의 에우데무스는 심문을 받았다. 고문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두 사람은 모든 사실을 폭로했고, 이후 두 사람은 소 드루수스를 죽인 자들에 대한 원한으로 똘똘 뭉친 황제의 명령으로 더 심한 고문을 받았다.

리그두스, 에우데무스 심문 직후, 티베리우스 황제는 리빌라에게 사형을 명령했다. 이때의 일에 대해 디오 카시우스는, 31년 아직 살아있던 며느리 리빌라에게 자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며느리 리빌라를 그냥 자살시키지 않고, 제수씨이자 리빌라의 어머니 안토니아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때 딸 때문에 사위, 큰며느리, 첫째 손자, 둘째 손자 등 혈육들을 모조리 잃은 안토니아는 살려달라고 사정하는 딸을 방에 유폐시킨 뒤 아무 것도 주지 못하게 해서 굶겨 죽였다.

세야누스 일당 중 주범과 공범들의 재판이 진행되던 와중인 서기 32년, 원로원의 요청으로 리빌라는 기록말살형에 처해지고 살아생전 누린 모든 영예와 특권이 박탈됐다.

서기 33년,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황궁 지하실에서 굶어 죽자 후계자의 생존을 진심으로 바랬던 티베리우스 황제는 벤데타를 발표하면서 원로원을 협박했다. 이때 원로원 역시 자신들에게 늘 유화적이고 인성과 능력 모두 평가가 훌륭한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생존을 몹시 바란 터라, 분노한 황제의 서한장에 동조하며 리빌라는 세야누스와 함께 원망의 대상이 됐다. 그래서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미망인 아이밀리아 레피다 등이 재조사 받을 당시, 리빌라에 대한 재조사가 추가로 열렸다. 이때 그녀가 세야누스 외에도 자신의 주치의 에우데무스, 원로원 의원이며 고귀한 시인으로 찬사를 받고 있던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와도 불륜 관계 중인 것이 드러나 모두를 놀라게 했다. 따라서 그녀와 불륜 관계였던 두 사람 중 살아있던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는 이 일로 처벌받는데,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는 리빌라와 불륜을 맺은 적이 없고 이 사건과 무관해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는 스카우루스의 아내조차 억울함을 호소할 정도로 명백한 덮어 씌우기였는데, 애당초 스카우루스가 티베리우스에게 공격받아 리빌라와 간통한 범죄자로 낙인 찍힌 이유는 그가 자신의 시에서 티베리우스 황제를 비난한 것 같은 문구가 있어 밉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스카우루스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재심을 요청했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 평가

로마 제국의 황녀 중 악녀 반열에 반드시 들어가는 공주인 만큼, 평가가 매우 나쁘다. 로마 제국의 세습왕조 중 궁중암투가 심했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내에서도 리빌라는 남녀 황족을 통틀어 가장 야심 많고 비열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그녀와 동급 수준으로 평가를 받는 남녀 황족은 메살리나, 소 아그리피나 정도라는 평도 있을 정도다.

더욱이 그녀는 사후 원로원의 요청으로 기록말살형에 처해지면서 직위가 박탈된 만큼이나, 이후 로마인들과 로마사 연구자들에게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단명, 티베리우스 재위 후기와 칼리굴라 시대의 공안통치 원인까지 초래했다고 거센 비난을 받았다.


[1] 게르마니쿠스는 기원전 15년생, 대 아그리피나(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 소 드루수스는 기원전 14년생, 리빌라는 기원전 13년생이다.[2] 이런 이유로 아이밀리아 레피다는 서기 33년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죽은 뒤, 재조사 과정을 거쳐 티베리우스의 명령에 따라 로마 귀족 남성들이 반역죄로 처형될 때의 방식(스스로 정맥을 자르고 사우나 안에서 고통스럽게 죽는 사형 방법) 그대로 죽임을 당한다.[3] 이 사건 이후, 소 안토니아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하며 팔라스에게 자유를 주고, 남편의 성씨와 막내아들 클라우디우스의 개인이름을 내려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해방노예로 만들어줬다. 이런 이유로 팔라스는 칼리굴라, 소 아그리피나에게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했고 네로 시대 당시에도 소 아그리피나의 꾀주머니 역할을 하며 세네카, 부루스와 대립했다.[4] 실제로 아우구스투스는 군대 지휘권인 프로콘술과 호민관 특권을 거머쥠으로서 사실상의 로마 초대 황제가 되었을 정도로 이 두 권한은 매우 중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