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아시니우스 갈루스 라틴어: Gaius Asinius Gallus | |
생몰년도 | 미상 ~ 33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제국 카프리 섬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로마 제국 |
가족 |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아버지) 퀸티아(어머니)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아내)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장남)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아그리파(차남) 그나이우스 아시니우스 살로니누스(삼남) 세르비우스 아시니우스 켈레르(사남) 루키우스 아시니우스 갈루스(오남)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8년 |
전임 |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 술피키아누스 |
동기 |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 |
후임 | 티베리우스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의 정치인.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치세에서 두각을 드러낸 정치인이었으나, 티베리우스의 전처 빕사니아 아그리피나를 취한 일로 티베리우스의 반감을 샀다가 세야누스의 농간으로 체포되어 3년간 감옥에 수감된 끝에 아사했다.2. 생애
아버지는 이탈리아 중부 티테 마루치노룸(현재 아브루초 주 키에티)의 유지였으며 저명한 변호사이자 기원전 40년 집정관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지지자로서 왕성하게 활동했던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이고, 어머니는 루키우스 퀸티우스의 딸 퀸티아다. 출생년도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으나, 40세 이상만 집정관에 오를 수 있다는 로마법을 고려하면 기원전 48년 이전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7년 퀸데킴비리 사크리스 파키운디스(quindecimviri sacris faciundis: 시빌라 예언서를 관리하는 사제)의 일원이 되었으며, 기원전 16년 재무관으로 선임되었다.기원전 11년 법무관에 취임한 그는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딸인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 결혼했다. 빕사니아는 티베리우스의 아내로, 티베리우스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러나 아그리파 사후 딸 대 율리아를 재혼시키려는 아우구스투스의 강압으로 어쩔 수 없이 빕사니아와 이혼하고 대 율리아와 결혼했다. 그는 즉시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 재혼했고, 티베리우스와 빕사니아의 유일한 아들인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실은 자신의 자식이라고 주장했다. 티베리우스는 이에 반감을 품고 이때부터 갈루스를 적대했다.
기원전 8년, 그는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때 갈루스가 유권자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뿌린 정황이 드러났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이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지 않았다. 그는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가 게르마니아 전쟁에서 거둔 승리를 기리기 위한 행사를 거행했으며, 티베르 강의 물줄기를 조사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문헌 기록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기원전 6~5년 아시아 총독을 맡은 사실이 그가 총독으로서 주조한 동전이 후대 고고학자들에게 발견되면서 밝혀졌다. 그는 웅변에 관한 글을 집필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고대 로마 최고의 웅변가로 손꼽히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와 아버지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를 비교하고 폴리오가 낫다고 주장했다.
타키투스에 의하면, 14년 죽음을 눈앞에 둔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와의 마지막 면담에서 3명의 인사를 거론했다. 그는 마니우스 레피두스는[1] 국정을 맡을 만한 능력이 있지만 이를 맡기를 싫어한다고 평했고, 갈루스는 기꺼이 그 임무를 감당하려 하겠지만 그럴만한 능력은 없다고 평했다. 또한 루키우스 아룬티우스(6년 집정관)는 최고의 권력을 가질 자격이 있으며, 기회가 오면 감히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레피두스와 갈루스를 언급했다는 것은 당대에 이견없이 받아들여졌지만, 일부에서는 아우구스투스가 아룬티우스의 자리에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를 대신 거론했다고 한다. 이 4명 중 레피두스와 피소는 티베리우스의 최측근이 되었지만, 갈루스와 아룬티우스는 티베리우스의 통치 기간 내내 갈등을 벌였다. 아우구스투스가 어떤 근거로 갈루스가 국정을 도맡을 마음을 품고 있다고 여겼는지는 알 수 없다.
아우구스투스 사후, 갈루스는 장례 행렬이 개선문 아래를 지나야 한다고 원로원에 제안해 관철시켰다. 이후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장에서 후계자로 지명되었지만, 뒤이은 원로원 회의에서 자신이 제국을 이끌 책임의 일부를 지겠지만 전부 지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그러자 갈루스는 "구체적으로 어떤 관직을 원하느냐?"라고 되물으면서, 아우구스투스는 제국을 분할하는 게 아니라 전체 권력을 받기를 원했을 거라고 주장했다. 아룬티우스 역시 비슷한 맥락의 발언을 하면서 티베리우스에게 책임을 원로원에 떠넘기지 말고 다 맡으라고 요구했다. 티베리우스는 짐짓 이를 받아들였지만 내심 "어떤 관직을 맡으려고 그러느냐?"라고 비꼰 두 사람에게 안 좋은 감정을 품었다고 한다.
15년, 연극 배우들의 방종한 행동을 개탄하며 그들을 처벌하겠다는 티베리우스의 제안을 지지했다. 그러나 16년 사치를 규제하는 법을 강화하겠다는 티베리우스의 발언에 항의했다. 또한 원로원의 결정이 필요한 사법 사건이 황제가 부재할 때 고려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앞으로 5년간 고위 관직을 맡을 관리를 즉시 선출하자고 제안했지만, 티베리우스는 그렇게 하면 황제의 권한이 제한될 것을 우려해 받아들이지 않았다. 20년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가 게르마니쿠스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내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이유로 고발되었을 때, 피소로부터 변호를 요청받았지만 거부했다.
24년, 로마 인민의 존엄성을 모독한 혐의로 기소된 대 아그리피나의 측근인 소시아 갈루스를 추방하고 재산의 절반을 몰수하라고 요구했다. 같은 해 정변을 꾀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비비우스 세레나를 흉악범, 정치범 등이 추방형에 처해질 경우 보내지는 기아라 섬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28년 티베리우스가 원로원에 대 아그리피나와 그녀의 아들 네로 카이사르를 우회적으로 비난하는 편지를 보내자, 갈루스는 황제에게 그가 공격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을 규탄하는 이유를 명확히 밝혀달라고 요청했다.
30년, 갈루스는 돌연 티베리우스가 은거하고 있던 카프리 섬으로 끌려간 뒤 지하 감옥에 갇혔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가 전처 빕사니아와 결혼한 갈루스를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고 갈루스와 그 친구 시리아쿠스를 모두 제거했다고 한다. 갈루스는 평소 세야누스의 야심을 알고, 그를 위험인물로 규정했는데, 세야누스는 이를 교묘하게 바꿔,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의 남편 갈루스가 마치 티베리우스와 세야누스의 우정을 경멸하고 질투하고 있다는 식으로 보고했다. 티베리우스의 동의를 받아낸 세야누스는 갈루스를 로마에 있던 티베리우스의 집에서 열린 연회에 초대해, 우정의 잔을 나눠 마시며 서약한 다음, 그를 체포해 원로원 안에서 "티베리우스에게 불경한 언사를 했다"라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내리게 했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본인은 전혀 이 사건을 몰랐다는 듯 서한을 보내면서, "로마 시민은 정당하게 자기변호의 기회를 얻고, 판결은 그 내막을 알아야 한다"고 의견을 밝히고 갈루스를 보호해주겠다면서 그를 카프리 섬으로 데리고 오라고 지시했다. 원로원이 이에 따라 갈루스를 보내자, 티베리우스는 그를 섬내 지하감옥에 가두고 음식도, 물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게 했다. 그러면서도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을 정도의 음식과 물을 제공해, 그가 쉽사리 죽지 못하게 했다. 이로 인해 3년간 굶주림에 시달리던 그는 33년에 아사했다. 한편 친구 시리아쿠스 역시 갈루스의 친구이며 불경죄를 방치했다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받은 뒤 처형되었다.
33년 10월 대 아그리피나가 사망했을 때, 티베리우스는 그녀가 "아시니우스 갈루스를 애인으로 삼았으며 갈루스 사망으로 인해 살아있는 걸 혐오했다"라고 비난했다. 갈루스는 기록말살형 처분을 받았으나, 티베리우스 사후 집권한 칼리굴라 황제가 이를 취소하고 그의 명예를 신원했다.
갈루스는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의 사이에서 다섯 아들을 낳았다. 장남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는 23년 집정관을 역임하는 등 정계에서 활동했지만 45년 발레리아 메살리나로부터 반역 혐의로 고발 후 처형되었다. 차남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아그리파는 25년 집정관을 역임했지만 26년 말에 병사했다. 삼남 그나이우스 아시니우스 살로니누스는 티베리우스의 손녀 중 한 명과 결혼할 예정이었으나 22년에 병사했다. 사남 세르비우스 아시니우스 켈레르는 38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물고기 한 마리에 8,000 세스테르티우스를 지불할 정도로 유명한 미식가였다고 한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 1세를 암살하려는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오남 루키우스 아시니우스 갈루스는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코르비누스와 함께 클라우디우스를 모해할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추방되었다가 클라우디우스 1세 사후 귀국했고 62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
[1] 로널드 사임은 마니우스가 아닌 마르쿠스 레피두스(6년 집정관)가 와전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레피두스 가문의 복잡한 가계도와 작명법 때문에 결론을 내기 힘든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