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7-12 08:32:47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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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
라틴어: Publius Vatinius
생몰년도 기원전 95년 ~ 미상
출생지 로마 공화국 리에티
사망지 미상
지위 평민
국가 로마 공화국
가족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아버지)
안토니아(첫째 아내)
폼페이아(둘째 아내)
참전 카이사르의 내전
직업 로마 공화정 집정관
로마 공화정 집정관
임기 기원전 47년
전임 율리우스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
동기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
후임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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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정치인, 군인. 키케로의 정적이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열성적인 지지자로, 카이사르의 내전 때 일리리쿰 평정에 기여했다.

2. 생애

사비니족이 세운 도시인 리에티 시를 기반으로 한 평민 집안인 바티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그의 조부가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 참가해 마케도니아 군주 페르세우스가 사모트라케 섬으로 도주했다는 걸 지휘관에게 처음 보고한 공적으로 병역 면제와 토지 할당을 받았다는 전승이 전해지나, 사실 여부는 불명확하다. 그의 아버지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는 훗날 그가 개선식을 거행한 뒤 기념 명판을 지을 때에만 새겨졌을 뿐, 행적은 전혀 알 수 없다.

학자들은 관직의 나이 제한을 설정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법을 근거로 그가 기원전 95년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는 어린 시절 많은 저명한 로마인들과 친분을 다졌는데, 특히 기원전 67년 호민관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와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법정에서의 연설에서 경력을 시작했는데, 이 연설에서 "약간의 뻔뻔함과 무례함"으로 자신을 돋보이게 했다. 그는 이 당시 재판관을 맡던 키케로에게 "내가 당신이라면, 이번 사건 판결을 주저하지 않았을 거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키케로는 그에 목에 부풀어오른 갑산선종을 바라보며 이렇게 답했다.
"그렇겠지. 하지만 내 목은 그렇게 두껍지 않소."

일부 학자들은 그가 자신의 신체 결함을 비꼰 것에 분노하여 이때부터 키케로를 적대시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기원전 63년, 그는 재무관에 선출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이해 선출된 재무관들 중 득표가 가장 적었다고 한다. 그는 처음엔 로마의 물 공급을 담당했고, 뒤이어 이탈리아에서 귀금속의 유출을 차단하는 목적으로 푸테올리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곳 주민들은 그가 책정한 수수료에 불만을 토로했고, 당시 집정관 키케로는 그를 소환했다. 기원전 62년, 그는 먼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 가이우스 코스코니우스의 부관으로 선임되었다. 그런데 그는 테베레 강 하구에서 마실리아를 거쳐 히스파니아로 가는 일반적인 경로로 가지 않고, 사르데냐를 거쳐 아프리카에 가서 누미디아의 히엠프살 2세와 접견했다. 그는 아마도 사익을 챙기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경로를 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키케로에 따르면, 히스파니아에 도착한 뒤에도 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해 비판받았다고 한다.

기원전 59년 호민관에 선출된 그는 그해의 집정관 율리우스 카이사르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가 격렬하게 대립할 때 카이사르를 열렬히 지지했다. 키케로는 카이사르가 제시한 농지법 통과 여부를 결정할 투표가 민회에서 열렸을 때, 그가 무뢰배들을 이끌고 농지법을 반대하는 자들을 향해 돌멩이와 다트를 던지게 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카이사르를 노골적으로 인신공격하는 비불루스를 체포하려 했지만 카이사르의 만류로 무산되었다.

그해 10월 초, 폼페이우스를 죽이려다가 체포된 루키우스 베티우스가 현직 집정관 비불루스,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 그리고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 등이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를 암살하는 걸 도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누구도 이 말을 믿지 않았고, 그는 곧 옥사했다. 훗날 키케로는 그가 가상의 음모를 만들고 벤티우스를 꼬드겨 폼페이우스를 죽이려는 시도를 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원전 59년 연말에 현직 집정관은 임기가 끝난 뒤 배정된 속주에서 5년간 직임을 수행할 수 있다는 법안을 민회에 제출해 통과시켰다. 카이사르는 이 법령에 따라 갈리아 키살피나와 일리리쿰에 대한 통제권을 얻고, 5년간 자율적으로 군대를 운용할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이를 바탕으로 갈리아 전쟁을 단행해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카이사르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의 호민관 임기가 만료되는 즉시 부관으로 임명했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칼푸르니우스가 "입법 활동에서 비정상적인 행위를 저질렀다"라는 사유로 그를 고발했지만,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가 비호해준 덕분에 무마되었다.

기원전 58년 3월에 카이사르와 함께 북쪽으로 간 그가 갈리아 전쟁에서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카이사르 본인이 집필한 갈리아 전기에도 그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그가 키케로를 탄핵한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걸 볼때, 카이사르가 갈리아 깊숙이 진격했을 때 그는 갈리아 키살피나에 남아서 정치에 개입했을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57년 조영관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키케로는 친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그가 낙선한 것에 몹시 기뻐하며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는 가난한 자와 눈에 잘 띄는 자들에게 지지를 받았지만, 가장 부유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는 무관했네. 그는 심지어 자신이 속한 부족의 표를 받지 못했고, 팔라틴 부족도 지지하지 않았네. 그는 국가를 파괴하는 데 기여했을 뿐이고, 이 선거 동안 완전한 실패만을 이루었네.

그를 대신하여 수석 조영관이 된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는 기원전 56년 2월 정적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를 폭력 행위로 고발했다. 그는 이 재판에서 기소 증인으로 나왔고, 푸블리우스 세스티우스 재판에서도 증인으로 나왔다. 그러나 두 재판 모두 무죄 평결이 내려졌다. 세스티우스의 재판 때 변호인을 맡은 키케로는 그를 심하게 비판하는 별도의 연설을 했고, 동생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에게 "청중들이 내 연설에 감동해서 박수를 보냈다"라고 자랑스러워하는 편지를 보냈다.

기원전 55년, 그는 법무관에 선출되었다. 마크로비우스(Macrobius)에 따르면, 법무관으로서 검투사 대회를 조직하던 중 관중들이 자신에게 돌을 던지자, 조영관들에게 앞으로는 관중이 무대에 과일 이외의 것을 던지는 걸 금지한다고 선언했다. 한 시민이 유명한 웅변가이자 법학자인 아울루스 카셀리우스에게 솔방울은 과일로 간주될 수 있는지 묻자, 카셀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바티니우스에게 던진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과일이다."

그는 법무관으로서 소 카토 등 카이사르의 정적들이 카이사르를 비방하며 로마로 소환해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번번이 물리쳤고, 카이사르에게 로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끊임없이 알렸다. 또한 카이사르의 요청에 따라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를 변호하기도 했다. 이후 수년간 별다른 언급이 없으나, 기원전 51년 벨가이 지방에 숙영하고 있던 카이사르의 군단 중 하나를 지휘한 걸 보면 그 사이에 카이사르와 합류한 뒤 갈리아 전쟁에 동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49년 초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그는 이탈리아에 따라가지 않고 갈리아에 남아서 군단들이 대거 떠난 뒤 부족들이 봉기할 가능성을 미연에 차단했다. 기원전 48년 1월 카이사르와 함께 발칸 반도로 건너갔고, 옵티마테스파 인사들과의 평화 협상을 맡았다. 그런데 그와 협상하던 티투스 라비에누스가 카이사르를 비꼬면서 그와 논쟁하더니, 창이 사방에서 갑자기 날아왔다. 그는 병사들이 방패로 보호해준 덕분에 무사히 탈출했지만, 그와 같이 온 많은 사절과 백인대장들이 부상당했다. 이 일로 휴전 협상은 중단되었고, 양자간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기원전 48년 여름 카이사르가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을 때, 그는 브룬디시움에서 사령관을 맡았다. 그의 임무는 이탈리아에서 카이사르를 지원하기 위한 추가 병력을 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데키무스 릴리우스가 지휘하는 폼페이우스 함대가 브룬디시움을 공격하는 바람에, 이를 막느라 카이사르를 돕지 못했다. 그러다 파르살루스 전투 결과를 전해들은 릴리우스가 퇴각하면서, 그는 겨우 봉쇄에서 풀려났다. 기원전 48-47년 겨울, 일리리아 총독 퀸투스 코르니피키우스마르쿠스 옥타비우스의 공세로 위기에 몰리자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로 갔기에, 일리리아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뿐이었다.

그는 중병에 걸렸지만 출진하기로 마음먹고, 카이사르가 브룬디시움에 남겨둔 병사들을 태워 발칸 반도로 건너갔다. 당시 에피다우로스를 포위 공격하고 있던 옥타비우스는 적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포위를 풀고 타우리스 섬 인근으로 이동했다. 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그를 추격했고, 양 군대는 곧 타우리스 해전을 감행했다. 당시 전장으로 쓰인 해로가 워낙 좁아서 지상전이나 다름없었던 이 전투는 그의 완승으로 끝났다. 옥타비우스는 바다에 뛰어든 뒤 적선을 피해 수영하여 간신히 탈출했다. 이후 살아남은 배 몇 척을 이끌고 아프리카로 도주했다. 이리하여 일리리아를 회복한 그는 브룬디시움으로 돌아와서 한동안 요양 생활을 했다.

나중에 그의 공적을 전해들은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 9월에 그와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를 집정관에 세우는 것으로 보답했다. 키케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꼬았다.
"바티니우스가 선출된 해에 큰 기적이 일어났다. 왜냐하면 이 집정관 아래에서 겨울도, 봄도, 여름도, 가을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의 내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는다. 기원전 46년 카이사르가 아프리카 원정에 착수할 때 함께 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를 입증할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 시기에 키케로와 화해하고 키케로가 카이사르의 용서를 받고 정계에 복귀할 때 힘써줬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45년경, 키케로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저는 당신을 가장 고마운 분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선언하는 걸 멈추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감사를 느꼈을 뿐만 아니라 가장 관대하게 보상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당신은 저만큼 당신을 사랑해줄 사람을 얻지 못할 겁니다."

기원전 45년 일리리아 총독으로 부임해 그곳을 안정시키는 임무를 수행하던 그는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얼마 후 일리리아인들이 로마가 카이사르 암살로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켜 로마군을 대거 죽였다. 그는 에피담노스로 후퇴하여 농성했다. 원로원은 그의 남은 군대와 속주를 카이사르의 암살자 중 한 명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에게 넘기기로 했다. 브루투스가 와서 군대를 넘기라고 요구하자, 그는 아무런 저항 없이 사임했다.

이후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제2차 삼두정치를 지지했고, 삼두정치를 결성한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기원전 42년 7월 31일에 그가 일리리아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식을 개최하고 그를 기리는 특별 명판을 세우도록 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누이인 안토니아와 첫번째로 결혼했고, 기원전 45년경에 폼페이아와 결혼했다. 그러나 두 결혼 모두 자식을 얻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