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라틴어: Gnaeus Papirius Carbo | |
생몰년도 | 기원전 129년 ~ 기원전 82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시칠리아 릴리바에움 |
지위 | 플레브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아버지)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동생)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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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추종자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 맞섰으나 끝내 패망했다.2. 생애
평민(플레브스) 씨족인 파피리우스 가문의 일원으로, 아버지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는 기원전 113년 집정관을 맡아 킴브리 전쟁의 첫번째 전투인 노레이아 전투를 치렀으나 킴브리족에게 완패한 후 기원전 112년 패전의 책임을 지고 유죄 판결을 받아 막대한 벌금을 내고 추방형에 처해질 위기에 몰리자 독약을 먹고 목숨을 끊었다. 형제로 기원전 89년 호민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가 있었다.그는 기원전 92년 호민관을 역임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집정관이었던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원로원에 호민관 카르보가 대중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켰다고 보고했다. 원로원은 풀케르의 보고서와 감찰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주장을 검토한 뒤 카르보가 "폭력적인 행동"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이렇다할 조치를 내리지 않았다. 기원전 89년에 법무관을 맡은 그는 동맹시 전쟁에 참전해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휘하에 들어가 루카니아인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기원전 88년, 호민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는 동맹시 전쟁 이후 선거권을 얻은 이탈리아 유권자들이 기존의 35개의 투표 부족들에 공평하게 분배되도록 해 그들의 투표가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그들을 8개의 새로운 부족에 배치하려 했던 원로원은 결사 반대했고, 기존의 로마 시민들 역시 정치적 특권을 새로운 시민들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었기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이에 술피키우스는 마리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마리우스는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을 치를 지휘권을 자신에게 넘기는 조건하에 받아들였다. 술피키우스는 마리우스의 지원에 힘입어 법안을 통과시킨 뒤, 현직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동방 총사령관 지명을 철회하고 그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넘긴다고 선포했다.
놀라에서 군대를 사열하고 있던 술라는 지휘권이 박탈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해 병사들을 선동하여 자기 편으로 삼은 뒤, 마리우스가 인수인계를 하려고 보낸 장교를 현장에서 살해하고 6개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하여 단숨에 공략했다. 이후 술라는 가이우스 마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를 포함한 정적 12명을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고 누구든지 그들을 죽이거나 자신에게 끌고 올 수 있다고 공표했는데, 이중에는 카르보도 있었다. 하지만 노예에게 배신당해 살해당한 술피키우스 루푸스를 제외한 '국가의 적들'은 추적을 피해 이탈리아를 탈출할 수 있었다.
기원전 87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가 티부르, 프라이네스테, 놀라 등 이탈리아 남부 지역을 돌며 술라파를 타도하려 할 때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등 여러 인사와 함께 가담했다. 그 해 말 가이우스 마리우스, 킨나 등과 함께 로마에 입성한 그는 닷새 동안 대숙청을 단행했다. 마리우스는 뒤이어 집정관에 선임되어 술라를 토벌할 준비에 착수했지만 기원전 86년 1월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킨나가 한동안 유일한 집정관으로 군림하다가 그 해 여름에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를 보결 집정관으로 선임했다. 이후 기원전 85년과 기원전 84년에 카르보와 함께 집정관을 잇따라 역임하며 로마와 대부분의 속주의 통치자로 군림했다.
기원전 84년 킨나가 술라를 토벌하기 위해 일리리아로 출진했다가 병사들의 반란에 휘말려 살해당한 뒤, 카르보가 마리우스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호민관은 새 집정관을 뽑아야 한다며 그를 로마로 호출했지만, 그는 단독 집정관으로 군림하고 싶었기에 이를 무시했다. 이에 호민관이 그의 권력을 배제하겠다고 위협하고 선거 날짜를 정하자, 그는 로마로 귀환한 뒤 불길한 징조를 핑계대며 선거를 계속 미뤘다. 그러던 중 벼락이 세레스 사원에 떨어지는 사건이 벌어지자, 그는 신께서 집정관을 뽑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집정관 선거 자체를 거론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그는 기원전 84년 내내 유일한 집정관으로 군림했다.
기원전 83년 집정관 선거에서는 마리우스파이지만 상대적으로 온건한 입장을 견지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와 가이우스 노르바누스가 당선되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카르보가 이 시기에 권력에서 밀려났다고 추정하지만, 대다수 학자들은 그가 권력을 유지했을 거라고 본다. 이 시기에 술라가 원로원에 서신을 보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술라는 망명자들에 대한 사면만 요청했다고 한다. 반면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정의를 관철하기 위해 자신을 추방하고 명예를 훼손한 자들과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원로원은 술라와 카르보 양자에게 군대를 해산할 것을 요청했지만, 두 사람 모두 무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로 마음먹었기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카르보는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을 역임하면서 군대를 모집했다. 징병 담당자들은 술라가 돌아오면 이탈리아인의 시민권과 평등한 투표권이 모두 무산될 거라고 주장했고, 이탈리아인들은 술라에 대적하고자 징병소로 찾아갔다. 그 결과, 카르보는 대략 15만에 달하는 대군을 확보했고, 술라의 5개 군단 3만 명을 충분히 압도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여기에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는 2개 군단과 함께 마케도니아 변방에 주둔했고, 열렬한 킨나파 인사였던 하드리아누스는 아프리카에서 병사와 물자를 모았다.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는 갈리아 키살피나에서 확고한 기반을 다져놓았고, 시칠리아는 거물급 민중파 인사인 가이우스 노르바누스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술라가 기원전 83년 봄 브룬디시움에 상륙하면서, 술라의 내전이 발발했다.
술라는 이탈리아인들이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잃어버릴까 봐 자신을 적대한다는 걸 간파하고, 상륙하자마자 이탈리아인들이 선거권을 갖는 걸 용인하겠다는 뜻을 공표했다. 브룬디시움 주민들은 이에 열광하여 술라를 환대했다. 그는 아피아 가도를 따라 진군하면서 자신의 선의를 과시했다. 병사들에게 시골 지역을 약탈하는 걸 엄금했고, 이탈리아인들에게 그들의 참정권과 투표권을 용인하겠다는 뜻을 거듭 밝혔다. 그러자 이탈리아인들은 술라에 굳이 대적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 마리우스파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던 태도에서 상황을 방관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카르보는 이 소식을 전해듣고 다음과 같이 평했다.
"보통 영웅들은 사자의 용맹함이나 여우의 교활함 중 한 성향을 갖고 있는데 술라는 이 두 가지 기질을 다 가지고 있다."
그 후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와 가이우스 노르바누스가 술라에게 완패하자, 그는 로마로 급히 귀환해 방비를 강화했다. 술라는 시간이 자기편이라고 믿고 결정적인 전투를 강행하려 들지 않았다. 그 대신 남부 이탈리아 일대의 지역 공동체들을 상대로 모병과 정치 공작을 펼치며 모두를 자신 편으로 끌여들이려 했다. 이에 카르보는 기원전 83년 7월 원로원에서 술라와 합류한 모든 사람을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도록 하고, 역시 이탈리아 전역에 사람을 보내 술라를 비난하는 공세를 펼쳤다. 이탈리아인들은 술라가 동맹시 전쟁 중에 히르피니족과 삼니움족을 상대로 잔인한 짓을 한 걸 잘 알았고, 술라가 지난날 이탈리아인들에게 평등한 투표권을 주는 걸 반대했고 로마에 무단으로 군대를 진군시키기까지 했던 걸 기억했다. 하지만 이제는 평등한 투표권을 인정해주겠다고 하고, 희대의 명장인 그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었기에, 중립을 택하거나 눈앞에 있는 편의 요구를 들어주는 쪽을 택했다.
카르보는 기원전 82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그는 동료 집정관으로 마리우스의 아들인 소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선출했다. 일명 '젊은 마리우스'로 불리는 이 20대 후반의 청년은 특별히 군사 통솔력이나 정치 수완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마리우스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 때문에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기원전 82년 봄, 카르보는 북부로 돌아가서 에트루리아, 움브리아, 갈리아 키살피나를 메텔루스 피우스와 폼페이우스의 침략으로부터 지키는 임무를 맡았고, 젊은 마리우스는 술라와 대결하기 위해 8개 군단을 이끌고 캄파니아로 내려갔다.
그러나 카르보는 폼페이우스와 메텔루스 피우스를 상대로 고전했다. 두 장군은 갈리아 키살피나로 군대를 보내는 한편 에트루리아에도 별동대를 보내 카르보가 한 쪽에 전력을 쏟지 못하게 했다. 카르보는 아드리아해안을 기지로 삼고 피우스의 라벤나 공략 시도를 봉쇄하려고 애썼지만, 제대로 된 해군을 가지지 못했기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내륙으로 진군하다가 젊은 마리우스를 물리치고 북쪽으로 진군하고 있던 술라와 마주쳤다. 양군은 곧바로 교전했는데, 이번에는 해가 질 때까지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후 술라와 대치하던 카르보는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가 움브리아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그쪽으로 파견대를 보냈다. 그러나 이 부대는 술라의 파견대에게 기습당했고, 5천 명이 전사했다.
카르보는 프라이네스테에 포위된 젊은 마리우스를 구원하여 술라를 북쪽과 남쪽에서 압박해야겠다고 판단하고, 아드리아 해안으로 철군한 뒤 그 도시를 구하러 갈 핵심 병력을 떼어냈다. 그러나 첫번째 구원군은 프라이네스테로 진군하던 도중에 폼페이우스의 기습으로 전멸했다. 얼마 후, 삼니움족과 루카니족이 힘을 합쳐 수만 병력을 일으켜 프라이네스테 포위를 풀려 했으나, 프라이네스테를 포위하고 있던 술라군이 이를 격퇴했다. 이렇듯 상황이 나빠지자, 카르보의 부관 한 명이 술라와 내통했다. 그는 중요한 일을 완수해낼 경우 관대한 처분을 받는다는 약속을 받고, 카르보의 군관 한 무리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이중에는 노르바누스도 있었다. 노르바누스는 배반 가능성을 의심하고 참가하지 않았지만, 나머지 군관은 초대에 응했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모두 붙잡혀 처형되었고, 부관은 곧바로 술라 진영으로 달아났다. 노르바누스는 이제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로도스로 망명했다.
카르보는 갈수록 악화되는 전황에도 프라이네스테로 계속 파견대를 보냈지만, 부대가 그곳까지 가지도 못하고 궤멸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그러는 사이 메텔루스 피우스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가 갈리아 키살피나 전체를 에워쌌다. 카르보에게는 아직 30,000명의 병력이 남았지만,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은 가망이 없다고 여기고 시칠리아를 거쳐 아프리카로 피신하기로 하고, 여러 군관에게 북부 이탈리아를 맡긴 뒤 변장한 채 시칠리아로 향했다. 그 후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을 끝낸 술라는 그를 숙청 대상자로 정하고 폼페이우스에게 카르보를 처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폼페이우스는 카르보가 시칠리아 해안에서 떨어진 한 섬에 있다는 정보를 토대로 시칠리아로 향했고, 도착하자마자 즉결 재판소를 열어 반술라파로 알려진 이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카르보는 결국 폼페이우스에게 사로잡힌 뒤 릴리바이움에서 처형되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처형 장소로 끌려갔을 때 마음을 추스릴 약간의 시간을 달라고 요청한 뒤 옷을 정돈한 후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했다고 한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폼페이우스는 대중이 지켜보는 앞에서 카르보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카르보는 "여자처럼 울면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폼페이우스는 그의 수급을 벤 뒤 술라에게 보냈다.
[1] 기원전 85년, 기원전 84년, 기원전 82년에 직접관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