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카리나스 라틴어: Gaius Carrina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가이우스 카리나스(아버지)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43년 |
전임 | 옥타비아누스 퀸투스 페디우스 |
동기 |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 |
후임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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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아버지는 플레브스 출신으로 기원전 82년 법무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카리나스였다. 그는 술라의 내전 시기 술라를 대적하는 군대를 이끌었으나 콜리네 성문 전투에서 패배한 뒤 생포된 후 참수되어 수급이 소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술라군에게 포위된 채 항전 중이던 프라이네스테로 보내지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 후 술라에 의해 정치 참여가 금지된 채 근근히 살아가던 그는 술라가 사망한 후 모종의 시기에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와 친분을 맺었다.기원전 54년 네포스가 숨을 거두었다. 그는 자녀가 없었기에 친척들이 재산을 물려받을 듯했지만, 유언장에서 다른 친척을 제쳐놓고 카리나스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겠다고 밝혔다. 그 후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편에 섰고, 기원전 46년 법무관을 맡아 카이사르의 히스파니아 원정에 참여했으며, 문다 전투 이후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잔여 세력을 규합해 게릴라 전을 벌이는 것을 제대로 막지 못했고, 카이사르에 의해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로 교체되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졌다. 그 후 그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명된 옥타비아누스의 후원자가 되었다. 기원전 43년 11월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군대가 로마를 점령한 후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와 함께 보결 집정관으로 선임되어 삼두의 이익을 대변했다. 기원전 41년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했고 아프리카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보구드가 페루시아 내전에서 옥타비아누스를 대적하고 있던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의 부추김에 따라 히스파니아를 쳐들어오자 이에 맞섰다.
기원전 39년 로마로 돌아왔고, 기원전 36년 옥타비아누스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토벌하기 위해 단행한 시칠리아 내전에 참여했다. 그는 함대와 수송선을 이끌고 시칠리아 해안으로 향하다가 타우로메니아에서 적 함대의 기습을 받고 크게 패했지만, 함대를 수습한 뒤 3개 군단을 리파리 섬으로 수송했다. 기원전 30년 갈리아 코마타("장발의 갈리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통해 정복한 갈리아 일대) 총독에 부임해 모리니 족의 봉기를 진압하고 로마령 갈리아를 공격한 수에비족을 라인 강 너머로 몰아냈다. 기원전 28년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했지만,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