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 라틴어: Mamercus Aemilius Lepidus Livian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가이우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조부)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아버지) 코르넬리아(어머니)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또는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양부)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친동생) 리비아(친누이) 코르넬리아 술라(아내) 아이밀리아 레피다(딸)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77년 |
전임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카피톨리누스 |
동기 |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
후임 |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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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프린켑스 세나투스. 본래 출신 가문은 리비우스 씨족의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 사람이나, 혈통적으로는 본래 아이밀리우스 씨족 가문 사람이다.2. 생애
이름 중 '리비아누스(Livianus)'에서 드러나듯이, 본래는 기원전 2세기에 로마 정계에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노빌레스 가문인 리비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다만, 본래의 혈통은 아이밀리우스 가문 사람이다.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차남으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의 동생인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아이밀리아누스이다.고조할아버지는 칸나이 전투에 참전해 전사한 집정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이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두 아들을 뒀는데, 장남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차남은 칸나이 전투 후 어린 나이, 친척 집안이던 리비우스 가문의 대가 끊길 위기 등을 고려해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의 양자로 입적된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아이밀리아누스이다. 그는 종종 마르쿠스 리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로도 불리는데, 마메르쿠스의 증조부가 이 사람이다. 따라서 마메르쿠스는 증조할아버지의 친조카들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도 혈연적 관계다.
증조할아버지 마르쿠스 리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의 행적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는 원로원 의원이었고, 본래 집안이던 아이밀리우스 가문이라는 배경이 후일 마메르쿠스가 대가 끊길 위기에 처한 레피두스 가문에 입양되는 이유가 됐다. 증조부 아이밀리아누스는 이름 미상의 아내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뒀는데, 이중 둘째가 마메르쿠스의 친할아버지이다.
친할아버지는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아이밀리아누스의 아들 가이우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다. 가이우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기원전 147년 집정관을 맡았다. 그는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고대 카르타고를 멸망시키는 임무를 놓고, 자신의 백부 마케도니쿠스의 둘째아들인 혈연상 사촌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경쟁했다. 그렇지만 그는 경력 등에서 완전히 스키피오에게 밀렸다. 하지만 그는 저명한 인사로 유명했고,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관계가 틀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람과 그의 아들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아래에서부터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은 본격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됐다.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의 친아버지는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다.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기원전 122년 호민관을 맡아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몰락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고, 기원전 112년 집정관을 역임한 뒤 기원전 109년 감찰관을 역임했다. 그의 아내, 그러니까 리비아누스의 친어머니는 대표적인 파트리키 집안인 코르넬리우스 씨족의 일원인 코르넬리아다.
보통 로마귀족과 두 가문의 양자 입적 방식은 아들이 여럿일 경우 통상적으로 장남 외의 차남 이하 아이를 입적시키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이를 고려한 호주의 작가, 신경과학자 콜린 맥컬로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에서는, 보통 로마귀족 풍습을 반영해,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가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동생으로 나온다.
하지만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는 본래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코르넬리아 부부의 자녀 중 장남이었다. 이는 그의 친부모가 귀족 사회에서 상당한 위치임을 떠올리면 의외일 정도의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입양된 아이밀리우스 가문의 권세와 파트리키 계급의 후계자라는 위상을 생각하면 놀랍지 않다는 평이 더 많다. 왜냐하면 혈연 관계가 아닌 가문에 장남을 입양해 보내는 경우는 정략혼 이상의 동맹 가문을 의미한 경우가 많았는데, 그는 대개 귀족 가문처럼 본래의 혈연적 본가 대가 끊길 위기에서 환속 형태로 재입양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코르넬리아 부부의 장성한 자녀 4남매 중 둘째였다. 위로는 이름 미상의 누나가 있었다. 이름 미상의 누이는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기원전 92년 집정관)의 아내였고, 클라우디아,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를 뒀다. 바로 아래에는 친동생으로 기원전 91년 호민관을 맡아 이탈리아의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려 했다가 피살당한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있었다. 그리고 여동생으로는 리비아가 있었다. 리비아는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와 잇따라 결혼했는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애인 세르빌리아와 카이사르의 정적 소 카토 등을 낳았다.
상술한 것처럼 그는 일찍이 파트리키 씨족 중 하나인 아이밀리우스 씨족에 입양됐다. 이때 그는 관례에 따라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로 개명했다. 다만, 본래 증조부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가문 사람이었다. 하여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 이래로,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문은 집안 남성들의 코그노멘을 파울루스, 레피두스를 모두 쓰게 된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는 그의 아버지가 마메르쿠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밝혔지만, 이외에 양부에 관한 정보는 전해지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은 기원전 126년 집정관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그의 양부일 수 있다고 추정하나 분명하지 않다.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125년에서 123년 사이에 태어난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1]보다 나이가 많았다고 한다.
기원전 91년경 사제단의 일원에 가담했으며, 동맹시 전쟁에도 참여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를 맡았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가 이탈리아인들의 봉기를 주동한 마르시족 지도자 폼페이우스 실로를 전사시켰다고 한다. 이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가 그와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으나 사실 여부는 불명확하다. 이후 술라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누구에게 가담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기원전 82년에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라는 인물이 이탈리아에서 술라에게 마지막으로 저항한 노르바 시의 성문을 몰래 열어서 술라군이 들어오게 했고, 시민들은 집단 자살하고 도시는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 인물은 그의 사촌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 의해 숙청 명단에 든 젊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용서해달라고 강력히 요청했다. 카이사르의 친척 및 인척들도 술라에게 용서를 청하자, 그는 투덜거리며 카이사르를 사면하겠다고 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당신들 좋을 대로 그 친구를 데려가시오. 다만 당신들이 그리도 살리고 싶어하는 사람이 언젠가는 당신들이 나와 함께 지켜온 귀족층의 대의에 치명타를 날릴 거라는 점만 알아두시오. 이 카이사르라는 친구 안에는 마리우스가 여럿 들어 있으니까."
기원전 81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79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으나 폼페이우스의 지원을 받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경합한 끝에 패배했다. 기원전 78년 재차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지만 친구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의 권유에 따라 그만뒀다. 기원전 77년 집정관에 드디어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함께 선출되었다.
당시 히스파니아 속주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던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를 토벌할 임무를 맡은 군대를 이끌라는 제안을 거부했고, 영향력 있는 원로원 의원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는 당시 별다른 공직을 맡지 않았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게 세르토리우스를 토벌할 임무를 맡기자고 제안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한 의원이 "폼페이우스가 집정관을 대신해서 임페리움을 받는 게 정말로 합당하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묻자, 필리푸스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아니오. 두 집정관을 대신해야 하오."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에 따르면, 기원전 74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크레티쿠스의 지휘하에 리구리아 해안에서 해적과 맞섰다고 한다. 또한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73년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와 함께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 두 인물은 이 항목의 주인공과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기원전 70년 프린켑스 세나투스가 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폼페이아 술라와 결혼해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아내인 아이밀리아 레피다를 낳았다. 일각에서는 형제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양자가 되었다고 알려진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는 실제로는 그의 아들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은 그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고, 현재는 폐기된 주장으로 취급받는다. 왜냐하면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는 본래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 출신이고, 이탈리아의 18-19세기 골동품 수집가이자 역사가 바르톨로메오 보게시가 처음으로 그 가계를 분석, 발표한 이래, 그의 어머니는 리비아누스, 소 리비우스 드루수스 형제의 이름 미상 누이가 낳은 아들이라는 평이 정설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1] 카이사르의 내전에서 카이사르 편에 선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의 아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