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 라틴어: Lucius Marcius Censorin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증조부)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조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아버지)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형제)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39년 |
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 |
동기 |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 |
후임 | 가이우스 코케이우스 발부스 푸블리우스 알페누스 바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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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처음으로 독재관과 감찰관을 역임하고 이후로도 로마 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노빌레스 씨족인 마르키우스 가문의 일원이다. 선조인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루틸루스 켄소리누스는 감찰관을 유일하게 두 번 역임했다고 알려진 인물로, 그의 직계 후손들은 대대로 감찰관(Censor)를 따서 '켄소리누스(Censorinus)'라는 코그노멘을 사용했다. 증조부는 기원전 149년 집정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로, 제3차 포에니 전쟁 시기 바다에서 카르타고를 봉쇄했다. 조부는 가이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는 것만 알려졌으며, 아버지 루키우스는 기원전 82년 화폐 주조관을 역임했다. 형제로 술라의 내전 때 마리우스파에 속했다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게 체포된 뒤 처형된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가 있었다.그는 술라의 숙청을 가까스로 모면한 뒤 잠자코 지내다가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카이사르의 편에 섰다. 이후 정치 활동을 허락받고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다마스쿠스의 니콜라오스에 따르면,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때 다른 의원들이 상황을 멍하니 지켜보는 사이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와 함께 카이사르를 지키려고 노력했다가 중과부적으로 쫓겨났다고 한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기원전 44년 4월 19일자 편지에서 독재관 치세 때 패자들로부터 빼앗아간 재산을 지키길 원하는 카이사르파 인사들 중 하나로 그를 거론했다.
기원전 43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지원 덕분에 법무관에 선임된 그는 안토니우스가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무티나 내전을 단행했을 때 참여했다. 그러나 원로원의 지령에 따라 안토니우스를 토벌하러 온 아울루스 히르티우스,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 카이트로니아누스의 로마군에게 패배한 뒤 안토니우스와 함께 갈리아로 도주했고, 원로원으로부터 안토니우스와 함께 국가의 적으로 선언되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는 곧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하고 로마를 점령하고 숙청을 단행했다. 그는 안토니우스에게 살해된 키케로가 소유했던 팔라티노 언덕의 저택을 손에 넣었다.
이후 필리피 전투에 참전해 안토니우스의 승리에 기여한 뒤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기원전 40년 말 로마로 돌아와 이민족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기념으로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39년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와 함께 집정관이 되었다가 몇 달 만에 가이우스 코케이우스 발부스, 푸블리우스 알페누스 바루스에게 직임을 넘겼다. 기원전 17년 시빌라 예언서를 관리하는 데켐브리의 일원으로 거론된 것을 제외하면,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기원전 8년 집정관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는 그의 아들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