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라틴어: Sextus Julius Caesar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90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오스쿨룸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아버지) 마르키아(어머니?)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형제?)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아들)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손자)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91년 |
전임 |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마르쿠스 페르페르나 |
동기 |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
후임 |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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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동맹시 전쟁 진압에 가담했지만 얼마 안가 사망했다.2. 생애
율리우스 가문은 고대 로마의 모체인 알바 롱가에서 시작된 파트리키 씨족이다. 이 가문의 일원들은 자신들을 비너스의 후예로 자처했으며, 로마 공화국 초기 집정관 등 고위 행정직을 잇따라 역임했다. 그러나 기원전 3세기부터 다른 가문들과의 경쟁에서 밀렸고, 나중에는 역사에 거의 언급되지 않을 정도로 쇠락했다. 그러다가 그들과 결혼 동맹을 맺은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유구르타 전쟁과 킴브리 전쟁의 영웅이 되어 집정관을 5번 연속 역임하면서, 쇠락한 가문 취급받던 율리우스 씨족의 출세길이 활짝 열렸다.아버지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알려졌지만 행적은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프리드리히 뮌처를 비롯한 많은 역사가들은 그 유명한 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버지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그의 형제라고 추정하지만, 고대 기록은 이를 전혀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분명하지 않다.
그가 집정관이 되기 이전의 생애는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공공 상점에서 무기를 챙겨서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공격한 귀족들 중에 "모든 율리우스"도 있었다고 밝힌 점을 볼 때 그도 여기에 가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등 다수의 율리우스 가문 인사들이 마리우스와 동맹을 끊었지만, 그는 마리우스와 계속 함께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91년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지만 집정관으로서 뚜렷한 행적을 보이지 않았으며, 필리푸스가 이탈리아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분배하는 법안을 제기한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와 심각한 갈등을 벌일 때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모종의 이유로 로마를 떠나 있었을 수 있다고 추정한다.
기원전 91년 말, 드루수스가 암살당하고 이탈리아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분배하는 법안이 폐기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이탈리아인들이 일제히 반란을 일으키면서 동맹시 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전직 집정관의 자격으로 피케눔 총독으로 부임했다. '율리우스'가 이끄는 45,000명의 로마군이 테아나로 진군했다가 삼니움인 마리우스 에그나티우스의 기습 공격을 받아 대부분 전사하고 생존자들은 무기를 모두 내주고 풀려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반란 진압에 뛰어든 율리우스는 그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는데, 둘 중 누가 이 패배를 초래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기원전 90년 후순, 섹스투스는 봉기를 처음 일으켰던 아스쿨룸 시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그러나 갑작스런 병에 걸려 부관 가이우스 베비우스에게 지휘권을 넘겼고, 얼마 후 숨을 거두었다. 이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가 로마에서 파견되어 아스쿨룸을 비롯한 북방 전선을 담당했다.
그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인과 결혼하여 아들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낳았다. 이 인물은 플라미네스(flamines: 고대 로마의 사제직)를 역임했다는 것 외에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의 아들인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48년 재무관을 역임했고, 기원전 47년 시리아총독에 선임되었다. 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친족들 중에서 자신과 가장 가까운 그를 후계자로 삼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했지만, 섹스투스는 불행히도 기원전 46년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바수스의 반란으로 피살되었다. 이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 다음으로 가까운 혈육인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