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 라틴어: Lucius Aemilius Lepidus Paull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미상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아버지) 아풀레이아(어머니)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동생)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아들) |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50년 |
전임 |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
동기 | 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
후임 | 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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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정치인, 군인. 카이사르의 내전 때 동생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지지했다. 카이사르 암살 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비난하는 키케로를 지지했으며, 제2차 삼두정치에 가담한 동생을 비판했다가 숙청될 뻔한 뒤 정계를 은퇴했다.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명문 귀족 집안인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씨족의 일원으로, 아버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휘하에서 내전에 참여했고, 술라가 독재관을 역임하던 시기인 기원전 78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러나 대표적인 포풀라레스 호민관이었던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의 딸 아풀레이아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는 등 은연중에 민중파의 입장에 공감했다.[1] 결국 기원전 77년 술라 정권에 대항하여 반기를 든 에트루리아를 진압하라는 원로원의 명령을 무시하고 오히려 반란군에 가담해 로마로 진격했다가, 폼페이우스에게 패한 뒤 사르디니아로 망명한 후 그곳에서 죽었다.그는 동생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2]와 함께 로마에 남아서 재산을 지킬 수 있었지만, 원로원에 반기를 들었던 가문이라는 낙인이 찍혀 버려서 옵테마테스파의 지지를 받기 어려웠다. 그래서 동생 마르쿠스는 민중파의 거두로 떠오르고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손을 잡았지만, 그는 카이사르를 지지하면서도 이와는 별개로 키케로와 나쁘지 않은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63년, 그는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를 반역 음모 혐의로 기소했다. 하지만 카틸리나는 로마를 떠났고 나중에 진압군에 의해 추종자들과 함께 죽었기 때문에 재판이 열리지 않았다. 기원전 62년 앞면에 여신 콩코르디아의 모습이 새겨졌고 뒷면에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페르세우스가 항복하는 모습을 새긴 주화를 주조했다. 기원전 59년 재무관을 맡아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휘하 마케도니아 방면 로마군에서 복무했다. 이 시기 로마에서 루키우스 베티우스가 폼페이우스를 죽이려 했다가 체포되었다. 베티우스는 현직 집정관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그리고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등이 폼페이우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하는 음모를 도왔다고 밝혔다. 그러나 아무도 이 증언을 믿지 않았고, 베티우스는 곧 옥사했다.
기원전 57년 망명 생활을 하던 키케로의 귀환을 지지했으며, 기원전 56년 폭동을 조직한 혐의로 기소된 푸블리우스 세스티우스를 지탄하고 고발할 의사를 밝혔다. 기원전 55년 조영관을 맡아 그의 조상 중 한 명이 새운 아이밀리아 바실리카를 재건했으며, 기원전 50년 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함께 집정관이 되었다. 이 시기 폼페이우스가 가세한 옵티마테스파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민중파간의 갈등이 불거졌다. 그는 아버지를 몰락시킨 폼페이우스를 마음 속으로 증오했지만, 개인적으로 흠모하는 키케로와 갈등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중립을 지켰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카이사르로부터 1,500달란트를 받았고, 그 돈으로 자신이 조영관으로서 재건한 아이밀리아 바실리카를 장식하는데 썼다고 한다.[3]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동생과 함께 카이사르를 지지했지만, 카이사르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약한 동생과는 달리 로마에 남아있을 뿐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다.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진 후 로마 정계가 카이사르파와 카이사르를 암살한 '해방자파'간의 대립으로 들끓을 때도 중립을 지켰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집정관 임기가 끝난 뒤 갈리아 카살피나 속주를 얻기 위해 그곳의 총독을 맡던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공격하면서 무티나 내전이 벌어졌을 때, 그는 다른 두 명의 사절과 함께 시칠리아 등 지중해 여러 섬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찾아가 협상했다.
이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비난하는 키케로를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동생이 안토니우스와 손을 잡자 안토니우스와 더불어 '로마의 적'으로 규정하는 데 찬성했다. 기원전 43년 가을 동생 마르쿠스,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가 제2차 삼두정치를 맺자 동생에게 이를 비판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로 인해 삼두정치파로부터 최우선 척결 대상으로 낙인찍혔지만, 이탈리아를 무사히 탈출하여 그리스 이오니아의 도시인 밀레투스로 망명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동생 마르쿠스가 그를 비호한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필리피 전투로 해방자파가 와해된 뒤, 동생 마르쿠스를 비롯한 삼두정치파로부터 로마로 돌아오라는 전갈을 받았으나 끝까지 거부하고 밀레투스에 그대로 남았다. 언제 사망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아들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기원전 34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22년에 감찰관을 맡았다. 그는 첫 결혼에서 두 아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4]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5] 그리고 딸 아이밀리아 파울라를 얻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누나인 소 옥타비아의 딸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와 재혼하여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굴루스를 낳았다. 레굴루스는 나중에 티베리우스 황제가 통치할 때 재무관으로 활동했다.
[1] 대 플리니우스는 레피두스가 아풀레이아와 이혼했다고 기록했지만, 언제 그랬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2] 막내가 한 명 더 있었는데, 기원전 83년 집정을 역임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의 양자로 입양되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아이밀리아누스'로 개명되었고, 기원전 77년에 아버지의 반란에 가담했다가 죽었다.[3] Plut. Caes. 29, 3.[4] 서기 1년 집정관. 아우구스투스의 손녀 소 율리아의 남편이기도 했는데, 아우구스투스 암살 모의 혐의로 처형당했다.[5] 서기 6년 집정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