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 라틴어: Quintus Hortensius Hortalus | |
생몰년도 | 기원전 114년 ~ 기원전 50년 6월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아버지) 셈프로니아(어머니) 호르텐시아(누이) 루타티아(첫번째 아내) 마르키아(두번째 아내)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아들) 호르텐시아(딸)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69년 |
전임 |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
동기 |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크레티쿠스 |
후임 |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퀸투스 마르키우스 렉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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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와 함께 당대 최고의 웅변가로 손꼽히는 인물이다.2. 생애
호르텐시우스 씨족은 기원전 3세기부터 언급된 노빌레스로, 기원전 287년 퀸투스 호르텐시우스가 파트리키와 플레브스의 분쟁을 종식하기 위해 독재관을 맡아서 호르텐시우스 법을 제정한 이래 여러 고위 행정관을 배출했다. 아버지 루키우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는 법무관을 맡아 시칠리아를 다스렸다. 기원전 108년 집정관에 당선되었으나 선거 과정에서 비리를 저지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아 직책을 상실한 퀸투스 호르텐시우스가 루키우스 호르텐시우스와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제기되나,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루키우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는 기원전 129년 집정관인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의 딸 셈프로니아와 결혼하여 그와 호르텐시아를 낳았다. 호르텐시아는 기원전 90년 동맹시 전쟁 때 가이우스 마리우스 휘하에서 군단장을 맡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와 결혼하여 기원전 53년 집정관을 역임한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루푸스를 낳았다. 일각에서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휘하에서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 참전한 루키우스 호르텐시우스가 그의 형제라고 추정하지만, 학계에서는 친족일 뿐이라고 본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저서 <브루투스>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호르텐시우스는 키케로보다 8살 많았고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에볼라가 집정관으로 재임하던 시기(기원전 95년)에 19세였으며 60살에 사망했다고 한다. 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호르텐시우스가 기원전 114년에 출생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초년기는 알려진 바 없지만, 웅변술을 연마하기 위해 그리스에 유학갔을 가능성이 높다. 19살 때인 기원전 95년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프리카 총독을 권력 남용 혐의로 기소한 것을 시작으로 법정에서 맹활약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91년, 그는 비티니아 왕국의 국왕 니코메데스 3세를 변호했으며 동맹시 전쟁 때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휘하에서 대대장을 맡아 캄파니아와 삼니움 전선에서 활동했지만 별다른 군공을 세우지는 못했다. 기원전 88년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간의 갈등이 내전으로 확산되었을 때 술라의 편에 선 것으로 추정되며, 마리우스의 정적인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의 딸 루타티아와 결혼했다. 기원전 87년 마리우스와 그의 동지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가 로마를 장악한 뒤 카툴루스 등 정적들을 모조리 처형했지만, 그는 로마에 남아서 변호사로서 활동했다. 이로 볼 때 술라에 동조하긴 했지만 정치에 깊이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를 입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86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아버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가 아스쿨룸에서 확보한 전리품을 도용한 혐의로 고발당했다. 당시 로마를 장악하고 있던 마리우스파는 마리우스파와 술라파 사이에서 박쥐같은 행보를 보였던 스트라보를 질시했기에, 그의 아들 폼페이우스를 처벌하려 했다. 이때 호르탈루스가 폼페이우스를 변호했고, 폼페이우스는 그 덕분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후 술라가 브룬디시움에 상륙하여 술라의 내전을 단행했을 때, 그는 마리우스파와 술라파간의 화해를 촉구했지만 전쟁이 결국 벌어지자 술라에게 귀순했지만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키케로는 그가 한 번도 내전에 참여하지 않아 사람들의 신망을 얻었다고 밝혔다.
기원전 81년, 섹스투스 네비우스가 푸블리우스 퀸크티우스의 채무 불이행을 고발했다. 그는 갈리아 나르본네시스 속주에 있는 푸블리우스 퀸크티우스의 토지를 자기가 소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호르탈루스는 네비우스의 편에 섰고, 키케로는 퀸크티우스의 편에 섰다. 키케로가 퀸크티우스를 옹호한 연설문이 현존하는데, 호르탈루스에게 극도의 존경심을 표하는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이 법정 다툼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키케로가 호르탈루스를 상대로 선전했다는 것만은 전해진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기원전 78년 술라의 장례식이 열렸을 때 "당대 최고의 웅변가"가 연설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 웅변가가 호르탈루스를 가리킨다고 추정하지만, 프리드리히 뮌처는 당시 감찰관을 역임했으며 역시 최고의 웅변가로 평가받던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기원전 77년, 호르탈루스는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의 재판에 참여했다. 술라의 저명한 추종자였던 이 인물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로부터 마케도니아 총독을 맡는 동안 속주민들을 심하게 착취한 혐의로 고발당했다. 호르탈루스는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와 함께 돌라벨라의 변호를 맡았다. 돌라벨라는 이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기원전 74년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처남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카피톨리누스와 함께 전임 호민관 퀸투스 오피미우스를 고발해 유죄 판결을 받아냈다. 키케로는 이에 대해 술라의 제도를 뒤집으려 했던 오피미우스에 대해 옵티마테스가 복수한 것이라고 밝혔다.
호르탈루스는 이외에도 여러 법정에 참여해 잇따라 승리를 거두면서 당대 최고의 웅변가로서 명성을 날렸다. 키케로는 그가 말을 무척 빠르게 하고 풍부하고 우아한 단어를 자주 사용했으며, 긴 연설을 단번에 외우고 경쾌하고 유쾌한 목소리로 군중에게 설파했다고 밝혔다. 또한 연설 시 취하는 자세와 움직임은 무척 우아하고 표현력이 뛰어났으며 옷을 잘 입었기에, 많은 이들이 그를 배우에 비유했다고 한다. 심지어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었던 퀸투스 로스키우스 갈루스와 클라우디우스 아이소프가 그의 재판에 종종 참관해 그의 연설을 보고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그가 별도로 출간한 연설문들은 웅변가가 되기를 꿈꾸는 이들의 교보재로 활용되었지만, 고대 작가들은 그의 글솜씨는 탁월한 웅변술에 미치지 못했다고 비평했다. 그의 연설문은 아쉽게도 현존하지 않고, 오직 키케로가 저서에서 인용한 대목만 전해진다.
이렇듯 웅변가로서 승승장구하던 호르탈루스는 기원전 70년 시칠리아 전임 총독으로서 시칠리아인들을 상대로 심각한 착취와 부정부패를 저지른 혐의로 고발당한 가이우스 베레스의 변호를 맡았다. 키케로에 따르면, 호르탈루스는 베레스와 오랜 우정을 맺었으며 베레스가 시칠리아에서 보낸 예술 작품을 자신의 저택에 장식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맡은 모든 재판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그는 시칠리아인들의 변호를 맡은 키케로에게 무참하게 무너졌다. 키케로는 "나는 당신의 재능을 존경하지만 당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밝힌 뒤 수많은 증인과 증거를 내세워 베레스가 저지른 범죄를 명확하게 입증했다. 호르탈루스는 키케로의 탁월한 논증에 별다른 대응을 못하고 재판 내내 침묵을 지켰다고 전해진다. 결국 베레스는 유죄 판결을 피할 길이 없어지자 마실리아로 망명했고, 그의 재산은 몰수되어 시칠리아인들에게 돌아갔다. 이리하여 로마 최고의 웅변가로 명성을 떨치던 그는 그 호칭을 키케로에게 넘겨야 했다.
한편, 호르탈루스는 정치 경력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기원전 75년 조영관을 맡아 검투 경기와 곡물 분배를 수행했으며, 기원전 72년 법무관을 맡아 법정을 관장했고, 기원전 70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해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크레티쿠스와 함께 당선되어 기원전 69년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이때 유권자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 후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으로 지명되었지만 동료 집정관 메텔루스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로마에 남았다. 디오 카시우스는 이에 대해 그가 로마의 법정에서 멀리 떠나고 싶지 않았기에 마케도니아를 동료에게 떠맡겼다고 주장했다.
집정관을 역임한 후, 호르탈루스는 가장 부유한 로마인 중 한 명으로 손꼽혔다. 그는 팔라티노 언덕에 거대하고 수려한 저택을 지었다. 카이사르의 내전이 한창이던 시기, 폼페이우스파였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는 카이사르를 꺾은 뒤 호르탈루스의 집을 자기가 가지겠다고 주장해 폼페이우스의 승인을 받아냈다. 훗날 아우구스투스는 호르탈루스의 집에서 살았다. 또한 호르탈루스는 푸에톨리, 피케네, 사비니 등 여러 지역에 별장을 세웠고 대형 동물원과 어항을 별도로 세웠다고 전해진다. 또한 플라타너스 나무에 물 대신 포도주를 붓곤 했고, 저녁 식사 때 공작 고기를 제공했으며, 연못에 곰치 등 희귀한 물고기를 키웠다고 한다. 동시대인들은 그가 공화국의 문제보다 곰치에 더 관심이 많다고 비꼬곤 했다.
그는 정치에 별로 참여하지 않았지만 귀족의 권리를 지켜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종종 원로원 의사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기원전 67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해적을 토벌하기 위해 모든 지중해와 지중해 해안선의 50마일 이내를 관할하는 권한을 3년간 누리게 하자는 호민관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의 제안을 반대했고, 기원전 66년 호민관 가이우스 마닐리우스가 폼페이우스에게 미트리다테스 6세를 제압하게 하자는 제안 역시 반대했다. 그러나 민회가 두 제안 모두 가결했기에, 그의 반대는 수포로 돌아갔다. 기원전 65년에는 전임 호민관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를 "원로원의 존엄함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했지만 피고 측 변호를 맡은 키케로의 탁월한 논변에 밀려 패배했다.
기원전 63년 유권자에게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소 카토에게 고발당한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를 키케로와 함께 변호해 무죄 판결을 받아냈으며,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의 모반 음모에 관한 원로원의 조사에 참여했고, 같은 해에 기원전 100년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를 재판 없이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가이우스 라비리우스를 변호했다. 당시 민회는 고소자인 티투스 라비에누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 쪽으로 쏠렸지만, 불길한 징조가 있다는 이유로 재판이 해산된 후 평결이 내려지지 않았고, 덕분에 그는 패배를 면할 수 있었다. 기원전 61년 카틸리나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를 변호하여 무죄 판결을 이끌어냈다.
기원전 59년 키케로와 함께 아시아 총독 시절 권력 남용 혐의로 기소된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를 변호해 무죄 판결을 얻어냈으며, 기원전 58년 카티리나 일당을 정당한 재판 없이 죽음으로 내몬 혐의로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로부터 고발당한 키케로를 변호했다가 폭동을 일으킨 시민들에게 죽을 뻔했다. 이때 그와 동행한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비비에누스는 클로디우스 지지자들에게 심한 구타를 당하고 곧 사망했다. 결국 키케로는 로마를 1년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56년 이집트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복위하는 것을 돕는 방법에 대한 논쟁에 참여해 무력으로 복위시키지 말고 3명의 사절을 보내서 외교로 해결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킬리키아 총독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에게 이 문제를 맡기자고 제안했다.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였지만, 시리아 총독 아울루스 가비니우스가 원로원의 동의없이 이집트로 진군해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복위시켜버리면서 무산되었다.
이후에도 여러 재판에 참여해 변호를 맡던 호르탈루스는 기원전 50년 4월 킬리키아 총독 시절 이민족에게 참패해 "로마인의 존엄성을 모독했다"는 혐의로 호민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에게 고발당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를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함께 변호하여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그 후 중병에 걸려 몇달간 칩거하다가 기원전 50년 6월에 사망했다.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내전이 시작되기 전해에 죽은 그가 실로 큰 행운을 누렸다고 평했다.
호르탈루스는 아내 루타티아와의 사이에서 아들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와 딸 호르텐시아를 낳았다. 아들 호르텐시우스는 옵티마테스의 편에 섰던 아버지와는 달리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추종했다. 그는 그런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겨 한 때 자기 아들 대신에 조카인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루푸스에게 유산을 넘겨주려 했다. 그러나 기원전 51년 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당한 루푸스를 변호해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가 쿠리오 극장에서 청중들에게 심한 야유를 받자 큰 충격을 받고 루푸스에게 유산을 물려주려는 계획을 포기했다. 아들 호르텐시우스는 카이사르의 내전에서 카이사르를 위해 싸웠고 기원전 45년에 법무관을 역임했다. 그러나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진 후 '해방자'를 자처한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을 지원했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인 가이우스 안토니우스를 처단했다.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에 참여했다가 생포된 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붙들려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의 무덤 앞으로 끌려간 뒤 참수되었다.
딸 호르텐시아는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1]와 결혼한 것으로 여겨지나 자녀를 얻지 못했다. 기원전 42년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해방자파와의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로마에서 가장 부유 한 1,400 명의 여성에게 세금을 부과하기로 결정하자, 자신들이 참여할 수 없는 전쟁을 위한 세금을 부과받은 것에 분노한 여성들을 이끌고 포로 로마노로 행진하여 항의 연설을 감행했다. 삼두는 그녀를 처벌하려 했지만 민심이 그녀 쪽으로 쏠리자 어쩔 수 없이 과세 대상 여성의 수를 400명으로 줄이고 그 대신 남성 재산 소유자에게 국가에 돈을 빌려주고 전쟁 비용을 분담하도록 했다.
호르탈루스는 루타티아와 사별한 후인 기원전 55년 소 카토에게 결혼 동맹을 제안했다. 그는 처음에 소 카토의 딸이며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의 아내였던 포르키아를 자신에게 달라고 요구했다. 카토는 호르탈루스를 존경하며 기꺼이 결혼 동맹을 맺을 의사가 있지만, 다른 사람과 결혼한 딸을 주기는 어렵다고 답했다. 이에 호르탈루스는 카토의 아내이며 기원전 56년 집정관이었던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의 딸 마르키아를 자신에게 달라고 요청했다. 소 카토는 마르키아를 몹시 사랑했으며, 당시 마르키아는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카토는 시아버지의 승인을 받고 마르키아와 이혼했고, 마르키아는 호르탈루스와 결혼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기원전 50년 호르탈루스가 사망한 뒤, 마르키아는 호르탈루스의 유언에 따라 막대한 재산을 얻고 소 카토와 재혼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등 소 카토의 정적들은 카토가 호르탈루스의 재산을 얻기 위해 마르키아를 빌려줬다고 비난했다.
[1]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양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