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그들은 요람에서부터 집정관으로 만들어진 사람들이다."
키케로
키케로
Nobiles. 고대 로마에서 평민(플레브스) 출신으로 출세하여 전통적 귀족인 파트리키와 동등한 위상에 도달한 이들을 일컫는 용어. 전통 귀족, 정통 귀족, 건국 귀족, 개국 귀족으로 번역하는 파트리키처럼 평민 귀족이나 신흥 귀족으로도 번역된다.
로마 공화국의 지배 계급을 구성했던 귀족 계층 중 하나로, 원래 평민이었던 자가 노빌레스로 귀족이 되어 이후 평민에서 원로원 의석을 얻은 '노부스 호모'나 본래 파트리키이나 집안이 몰락했다가 원로원에 입성한 이들과는 차별된 세습 귀족들로 평가받았다. 종래 귀족 계층에 해당된 파트리키와 상호 결혼, 입양 등으로 공화정 중기부터 원로원에 입성해 세습 형태로 지위를 승계했고, 전통적인 파트리키 계급 가문들과 달리 플레브스의 지위도 함께 누리며, 플레브스 민회 발언권과 호민관 직을 독점적으로 차지한 것으로 유명하다.
2. 상세
로마 공화국 초기에 모든 부와 권력을 장악하고 정국을 좌지우지하던 파트리키는 수백년간 평민(플레브스)들의 강력한 저항에 시달린 끝에 그들에게 정치적 양보를 해야 했다. 특히 기원전 367년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Licinio -Sextian rogations)이 도입되면서 2명의 집정관 중 한 명은 무조건 평민이 선출되게 되면서, 평민들의 정치적 입지가 대폭 강화되었다.물론 파트리키가 무력하게 권력을 내어준 것은 아니었다. 집정관에 당선된 평민들은 대부분 강력한 입지를 갖춘 파트리키와 클리엔텔라 관계를 맺은 이들이었고, 이후에는 파트리키로 가득한 원로원에서 '신참' 취급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파트리키들은 집정관 한 자리를 평민에게 양보한 뒤에도 로마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특권을 향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파트리키들은 일상이나 다름없는 전쟁에서 군공을 쌓아 더 많은 명예와 부를 얻기 위해 전장에 앞장서서 뛰어들다 종종 목숨을 잃곤 했다. 그들은 양자를 맞이하는 방식으로 가문의 대를 이으려 노력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고, 공화정 후기에 무수한 가문의 대가 끊겼다. 급기야 기원전 1세기에는 파트리키가 거의 남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들의 빈 자리는 자연스럽게 군공을 세우면서 강력한 입지를 다진 평민들이 차지했다. 처음 집정관에 올라 명예를 얻은 이들은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로 일컬어졌고, 이들의 후계자로서 명예와 부를 이어받아 성공가도를 달리는 자들은 노빌레스(Nobiles, 잘 알려진 자들)로 일컬어졌다. 다만, 이 단어가 언제부터 이런 정의로 유래됐고, 관례화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고대 로마인들이 직접 기록한 것이 존재하지 않고, 로마 사회에서 뚜렷하게 이때부터 이렇게 관례화되었다고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 학계에서 통설로 지지를 받고 있는 19~20세기 스위스, 독일의 고전학자 마티아스 겔처의 연구에 따르면, 노빌레스는 일반적인 노부스 호모의 가족들과 달리, 친인척을 통해 파트리키 계열의 가문 혹은 그 조상이 왕정 시대의 왕, 집정관이나 개선장군 등 집정관 이상의 최고위 거물 정치인을 둔 집안 및 그 가문들이 파트리키들을 압도하면서, '명망가'라는 뜻의 노빌레스로 자연스레 불렸다고 한다. 이는 테오도어 몸젠의 연구도 거의 비슷한데, 몸젠 역시 노빌레스들이 대체로 이런 부류의 이들로 노부스 호모와는 차이가 있던 가문들이었다고 평한다.
따라서 노빌레스들은 여타 다른 파트리키들과 달리, 왕정 시대까지 그 조상과 시조가 뚜렷하게 거슬러 올라간 것이 확인된 칼푸르니우스 가문, 폼포니우스 가문이나, 에트루리아나 산니움 기원의 리키니우스 가문, 에그나티우스 가문, 라티움 일대의 오래된 플레브스 일족들인 도미티우스 가문, 리비우스 가문, 스크리보니우스 가문 등 기존 파트리키와 비교해 가문의 역사나 재력, 인지도가 높은 집안들이 많았다. 또 그들은 노부스 호모 중 가장 성공했고, 대정치가를 배출하며 노빌레스로 올라선 셈프로니우스 일족의 그라쿠스 가문의 예처럼 대체로 가문의 조상들이 파트리키 가문 혹은 고위 정무관 중 개선장군, 여러 번의 집정관 경력자들을 배출한 일가와 그 가문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포에니 전쟁 전부터 파트리키들과 상호 통혼 및 입양을 통해, 친인척이 된 리비우스 가문이나 셈프로니우스 가문의 사례는 노빌레스 역사에서 일반적이었다.
이들은 파트리키와 달리, 기본적으로 본래 평민 출신이었기에, 정치 활동이나 사회 활동 측면에서 활동폭이 넓었다. 그들은 평민만으로 구성된 민회에 참여하여 의결권을 행사하고 호민관으로 뽑히는 등 평민들의 대표자로 행세하면서도, 잔존한 파트리키 가문과 거리낌없이 통혼하고 그들과 같은 특권을 누렸다. 따라서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몇 대에 걸쳐 집정관을 역임한 과정에서, 파트리키들과는 다른 경력을 쌓는 모습이 많았다. 이런 '평민 귀족'의 위상은 기존의 파트리키와 동일한 수준이 되었는데, 공화정 중기 이후부터는 이런 환경 속에서 오히려 많은 파트리키들이 이들과의 경쟁에서 밀려나 쇠락했다.
노빌레스는 자신들의 특권을 조금이라도 제약하려는 움직임을 차단하는 데 있어 파트리키보다 더욱 열성적이었다. 한 예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농지 개혁에 전면으로 맞섰던 호민관 마르쿠스 옥타비우스는 평민 출신으로 기원전 165년 집정관에 오른 노빌레스 계급의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의 아들이었다. 또한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농지개혁을 훼방놓은 끝에 몰락시켜 원로원으로부터 "원로원의 수호자" 칭호를 얻었다.
반면, 평민의 지지를 등에 업어 기존의 정치 판도를 뒤엎어서 권력을 획득하려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원로원과 파트리키의 권위에 정면 도전했으며, 원로원에서 자신들의 뜻이 관철되지 않을 때마다 민회를 이용해 법을 통과시키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투표권을 확장하고, 빈곤을 구제하고, 농업, 식민도시, 곡물법 등 광범위한 복지 개혁을 추진하여 대중의 지지를 얻기를 원했다. 그러면서도 법질서를 유린하고 정치테러를 서슴지 않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가령,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는 자기가 밀어주는 후보가 집정관 선거에서 낙선하자, 추종자들을 시켜 집정관에 당선된 자를 살해해 버렸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는 폭동을 일으켜 현직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목숨을 위협하고,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영합해 술라가 가지고 있던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넘겨버렸다가 술라의 로마 진군을 초래했다. 그리고 마리우스는 술라에게 축출되었다가 도로 복귀한 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등과 함께 수많은 이를 살상했다. 이렇듯 파트리키와 영합하여 평민들을 위한 개혁을 저지하는 자들은 옵티마테스, 평민들의 대표를 자처해 기존의 정치 판도를 뒤엎으려는 자들은 포풀라레스라고 일컬어진다.
노빌레스는 민중파를 자처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가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면서 로마 제국이 등극한 후에도 제국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지배 계급을 형성했다. 그들의 정치적 중요성은 황제와 영합한 에퀴테스의 대두와 군인 황제 시대를 거치면서 점차 줄어들었지만, 그들은 제국이 무너질 때까지 엘리트로서 존경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