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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 Magister equitum |
1. 개요
로마 공화국 시기 독재관의 부관으로 선임된 고위 행정관. 명목상 역할은 로마 기병대를 지휘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독재관을 보좌하고 독재관이 부재할 때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했다. 부독재관, 사마관으로 번역되기도 한다.2. 상세
로마 왕국 시기, 로마 국왕(렉스)은 모종의 사유로 원정을 떠나는 군대의 지휘를 맡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임시로 지휘권을 맡길 대리인을 지명했다. 이 인물은 마기스테르 포풀리(magister populi: 백성의 지휘관)으로 일컬어졌다. 전승에 따르면, 로마 제6대 국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에트루리아의 노예였으며, 본래 이름은 막스타나(Macstarna)였다. 이것이 라틴어식 이름인 마기스테르(magister)로 변경되었고, 지휘관을 가리키는 호칭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 마기스테르 포풀리를 보좌하는 인물이 바로 기병대장인 마기스테르 에퀴툼(magister equitum)이었다.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가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왕정이 타도되고 로마 공화국이 수립된 뒤 로마 내부에선 계층간 갈등이 갈수록 심해졌다. 급기야 기원전 494년 플레브스들이 징집을 거부하고 성산(聖山)[1]에 모여 투쟁한 성산 사건이 발생하자, 원로원은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으로 세워서 이 사태를 해결하게 했다. 리비우스는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를 최초의 독재관으로 지목하면서, 마니우스가 지명한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프리스쿠스 스트룩투스가 최초의 기병장관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리비우스가 소개하는 다른 전승에는 기원전 501년 로마와 전쟁을 일으키려 드는 사비니족에 맞서 싸우기 위해 선임된 티투스 라르키우스 플라부스가 최초의 독재관이고, 티투스에 의해 선임된 스푸리우스 카시우스 베켈라누스가 최초의 기병장관이라고 밝혔다. 어느 쪽이 옳은 지는 불분명하다.
독재관은 두 집정관 중 한 명에 의해 지명되고 원로원의 동의를 얻어 선임된 뒤 자신을 보좌할 이를 기병장관에 반드시 선임해야 했다. 만약 기병장관이 임기 중 사망하거나 모종의 이유로 사임한다면, 독재관은 2번째 기병장관을 선임해야 했다. 독재관이 임무를 완수하고 물러날 경우, 기병장관 역시 물러나야 했다. 독재관은 로마 내에서 릭토르를 12명 대동하고 로마 바깥에서는 24명을 거느렸던 반면, 기병장관은 단 한 명도 거느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독재관을 보좌하는 고위 관료로서 상당한 권위를 누렸고, 독재관이 부재할 시 그를 대신하여 독재관이 맡은 임무에 한정하여 전권을 행사했다.
본래 독재관과 기병장관 모두 파트리키가 맡았지만, 기원전 368년 독재관 푸블리우스 만리우스 카피톨리누스가 플레브스를 회유하기 위해 호민관을 역임했던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스톨로를 기병장관에 선임했고, 기원전 356년에는 플레브스 출신의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루틸루스가 독재관에 선임되면서 두 고위 행정관 모두 플레브스에 개방되었다. 귀족들은 이에 반발했지만, 루틸루스가 로마 코앞까지 침투한 에트루리아인들을 물리치는 업적을 세우면서 무마되었다.[2]
독재관은 비단 군대를 이끌어 외적을 상대할 때만 선임되지 않았고, 정무관 선거를 위한 민회 개최를 위해 선임되거나 폭동을 진압하거나, 종교 축제를 개최하거나, 원로원 의원을 선출하는 등 다양한 사유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군대를 이끌지 않더라도 관례에 따라 기병장관을 반드시 선임해야 했다. 초기에는 집정관이나 집정 무관을 역임했던 이가 일반적으로 기병장관에 선임되었고, 법무관이 설립된 후에는 법무관 경험자가 주로 기병장관을 맡았다. 기병장관을 맡은 이들 중 군사 지휘 경험이 있으면서도 집정관에 아직 오르지 못한 이들도 여럿 있었는데, 그런 그들에게 기병장관은 집정관을 향한 귀중한 디딤돌이었다.
기병장관은 대부분 독재관의 선택을 받았던 만큼 그의 정책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다만 딱 한 가지 예외가 있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 한니발 바르카의 침략이 갈수록 심해지자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독재관에 선임되었다. 파비우스는 한니발과 정면 대결하면 승산이 없으니 이를 회피하면서, 적의 뒤를 쫓아가면서 소규모 분견대를 물리치고 적의 전쟁 물자 수급을 훼방놓는, 이른바 소모전 전략을 구사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한니발이 심각한 약탈을 일삼고 곳곳에 불을 지르는데도 적극적으로 막지 않고 쫓아가기만 하는 그를 '굼벵이', '겁쟁이', '비겁자'라고 비난했다. 기병장관을 맡은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 역시 파비우스가 독재관의 전술을 정면 비판하며, 공개적으로 게으름벵이이자 겁쟁이라고 모욕했다.
급기야 파비우스가 독재관으로서 받은 임페리움을 미누키우스 역시 비슷하게 부여받는 법안이 도입되면서, 두 사람은 각각 2개 군단씩 나누어 군대를 이끌었다. 파비우스는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뜻을 꺾지 않고 한니발과 섣불리 싸우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미누키우스는 무시했다. 그러나 미누키우스는 게로니움 전투에서 한니발의 책략에 휘말려 참패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미누키우스는 자신을 구해준 파비우스를 찾아가 부복하면서 "나의 아버지여!"라고 외치며 앞으로 그의 뜻에 따르겠다고 맹세했고, 파비우스도 그를 용서하고 다시 휘하에 맞이했다고 한다.
포에니 전쟁 이래 로마의 영향력이 지중해 전역에 확산된 후, 로마군이 치른 모든 전쟁은 집정관 및 법무관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로 인해 독재관은 오랫동안 선임되지 않았고, 자연히 기병장관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다 기원전 82년 술라의 내전에서 승리하고 로마에 입성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인터렉스를 맡을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에 의해 독재관에 선출된 뒤 이에 대한 보답으로 플라쿠스를 기병장관에 선임했다. 그러나 술라가 나름의 개혁을 추진하는 동안, 플라쿠스는 별다른 권한을 행사하지 않았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을 단행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선거를 실시할 목적으로 독재관을 잠시 맡았지만 기병장관을 별도로 지명하지 않았다. 기원전 47년 2번째로 독재관을 맡은 그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기병장관에 선임하여 로마의 내정을 맡겼다. 그러나 안토니우스가 실정을 저지르자 크게 실망해 그의 권한을 박탈하고,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를 기병장관에 임명했다. 레피두스는 로마의 혼란을 성공적으로 수습하고 치안을 내전 이전 수준으로 되돌리는 등 뛰어난 행정력을 발휘했고, 이에 만족한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을 맡으면서 레피두스를 기병장관에 계속 재임시켰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4년 파르티아 원정을 착수하여 레피두스와 함께 출전하면서, 친척인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를 마기스테르 에퀴툼으로 예정했고, 기원전 43년도 기병장관에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를 선임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발발하면서 무산되었다. 레피두스는 카이사르가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가 주둔해 있던 테베레 강 중앙에 있는 섬으로 가서 군대를 마르스 광장으로 이동시킨 뒤 카이사르를 암살한 자들을 처단하려 했지만, 집정관 안토니우스가 말리면서 무산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원로원을 달래기 위해 "독재를 영원히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리하여 술라와 카이사르가 맡았던 종신 독재관은 로마법에서 불법으로 간주되었다. 이후 벌어진 내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면서 지중해 세계 제일의 권력자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독재관을 맡았다가 공화정을 여전히 추구하는 원로원 의원들의 극심한 반발을 살 것을 우려해 독재관을 맡지 않기로 했고,[3] 그의 뒤를 이은 로마 황제들 역시 독재관을 칭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독재관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독재관에 의해 선임되는 기병장관 역시 오랜 세월 등장하지 않았다.
로마가 극도의 혼란에 휩싸인 군인 황제 시대의 황제 갈리에누스는 이민족과 반역자들의 준동으로부터 본국인 이탈리아와 로마를 지키기 위해 밀라노에 기병 조직을 창설했다. 그러면서 이들을 맡을 지휘관을 선임하기 위해 기병장관을 부활시켰다. 이 직위를 맡은 이들은 로마군에서 강력한 입지를 다지고 이탈리아를 지키는 데 공헌했으나,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하는 기병대를 총괄하는 만큼 위세가 대단했기에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제위에 도전하기 일쑤였다. 처음으로 이 직위를 맡은 아우레올루스부터 갈리에누스에게 반기를 들었고,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아우렐리아누스는 이 직위를 맡은 후 전임 황제를 무너뜨리고 황위에 올랐다. 285년 군인 황제 시대를 종식시키고 황위에 오른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기병장관이 지나치게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폐지했다.
사두정의 내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여 로마 제일의 권력자가 된 콘스탄티누스 1세는 로마군을 코미타텐세스 위주로 개편하는 한편, 기병장관을 마기스테르 페디툼(magister peditum: 보병의 지휘관)과 함께 부활시켰다. 이후 두 관직은 기병과 보병 모두를 아우르며 각 관구의 방위를 담당하는 직책인 마기스테르 밀리툼(Magistri militum)의 부관 역할을 맡았다. 다만 기병장관은 서로마 제국의 관제에서만 확인할 수 있고, 동로마 제국에서는 각 마기스테르 밀리툼들이 기병 벡실라리오 부대들을 직접 이끌었다. 이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마기스테르 밀리툼으로서 수아송에서 할거하던 시아그리우스 역시 487년 프랑크 왕국에 무너지면서, 마기스테르 밀리툼 휘하에서 활동하던 기병장관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3. 역대 기병장관
[1] 현재 이탈리아 로마 몬테 사크로(Monte Sacro)[2] 루틸루스는 기원전 352년에는 평민 최초로 감찰관에 오르기도 했다.[3] 대신 그는 여러 특권을 받고 그것을 후계자에게 상속시키며 실질적인 군주로 군림했다. 로마 황제 문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