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라틴어: Publius Aelius Paetus | |
생몰년도 | 기원전 240년 경 ~ 기원전 174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조부) 퀸투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아버지) 섹스투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카투스(형제) 퀸투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01년 |
전임 |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풀렉스 게미누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
동기 |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
후임 |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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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2. 생애
평민 가문인 아일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그의 조부는 퀸투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고 아버지는 퀸투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썼다. 아버지 퀸투스는 사제단의 일원이었으며 기원전 217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이후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에 참가했다가 전사했다. 형제로 기원전 198년에 집정관을 역임한 섹스투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카투스가 있었다.기원전 208년 한니발 바르카와의 전투 도중에 전사한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뒤를 이어 사제 직책인 아우구르(Augur)에 선출되었다. 기원전 204년 평민 조영관을 역임했고 기원전 203년 법무관에 선출되었다. 이후 로마에서 법정 소송을 담당했으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누미디아 국왕 시팍스를 물리치고 누미디아 왕자 마시니사를 왕위에 올림으로써 카르타고의 동맹국이었던 누미디아를 로마의 동맹국으로 삼는데 성공했다는 소식을 원로원에 알렸다.
기원전 202년 말 집정관이 부재한 상황에서 선거를 주관하기 위해 독재관에 선출된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휘하 기병장관을 맡았다. 기원전 201년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렌툴루스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로부터 아프리카 원정 지휘권을 빼앗으려 할 때, 그는 자신이 스키피오를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인식하고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로 부임하라는 원로원의 지시를 순순히 따랐다고 한다. 그는 그곳에서 반란을 일으킨 보이족에 맞섰지만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연말에 로마로 돌아와 고위 행정관 선거를 주관했다.
기원전 201~200년 아풀리아와 삼니움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퇴역병들이 정착할 토지를 마련하는 임무를 수행한 위원회의 일원이었다. 기원전 199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출되었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프린켑스 세나투스에 선정했다. 그는 감찰관을 맡으면서 원로원이나 에퀴테스에서 단 한 사람도 추방하지 않았고 단 한 건의 비판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193년 푸블리우스 빌리우스 타풀루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와 함께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를 찾아가서 에페소스에서 안티오코스 3세에게 그리스로 넘어오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했지만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했다. 기원전 174년에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아들 퀸투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는 기원전 167년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