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라틴어: Quintus Fulvius Flaccus | |
생몰년도 | 기원전 270년경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미상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아버지)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동생)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동생) 술키피아(아내)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아들) 루키우스 만리우스 아키디누스 풀비아누스(아들)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아들) |
참전 | 제2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37년 |
전임 |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팔토 |
동기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 |
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바루스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24년 |
전임 |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푸스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
동기 |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
후임 |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푸블리우스 푸리우스 필루스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12년 |
전임 | 소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
동기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
후임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09년 |
전임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 |
동기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
후임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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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활동한 고대 로마의 귀족이자 장군. 집정관을 총 네 번 역임하면서 갈리아족과 한니발 바르카에 맞섰으며, 한니발과 연합한 카푸아 공략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2. 생애
4세기 중반부터 로마 정계에서 활약한 노빌레스 집안인 풀비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아버지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264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동생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212년 법무관을 역임했고, 또다른 동생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213년 그의 군대에 부관으로서 복무했다.기원전 237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처음으로 선출되어 리구니아인 또는 갈리아인과의 전쟁에 투입되어 승리를 거두었다. 기원전 231년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와 함께 감찰관을 맡았으나 선거에서 부정행위가 발각되는 바람에 두 사람 모두 사임해야 했다. 기원전 224년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와 함께 두번째로 집정관에 선임되었고,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포 강을 건너 보이족을 로마의 지배하에 두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이후 장마와 역병으로 인해 더 이상 군사 활동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반면 파울루스 오로시우스는 두 집정관이 인수브레스족과의 전투에서 23,000명의 적병을 죽이고 6,000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기록했다.
기원전 217년 여름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에서 로마군이 참패당하고 집정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가 전사했을 때, 그는 잔여 로마군을 수습하여 독재관에 선임된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에게 넘겼다. 기원전 216년 사제를 맡았으며, 기원전 215년에 법무관을 역임하였으며, 25척의 선박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고 해안을 방어하고, 토르콰투스의 사르데냐 원정을 지원했다. 또한 민간 도금업자에게 히스파니아 전선에 파견된 로마군에 군수물자를 지급하는 문제를 전담하도록 하였다. 기원전 214년 법무관에 재선되었으며, 기원전 213년 두 집정관이 전쟁으로 바빠서 선거를 주관하기 어렵게 되자 집정관 선출을 위해 뽑힌 독재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켄토 휘하의 기병장관으로 발탁되었다. 이후의 집정관 선거 결과, 그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선출되었다.
집정관에 선출된 뒤, 캄파니아에서 한니발 바르카에 대적하는 역할을 맡았다. 당시 한니발의 부하 한노는 기근에 시달리는 카푸아인들을 돕기 위해 베네벤툼에서 식량을 모으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플라쿠스는 기원전 212년 초 비밀리에 베네벤툼으로 이동했다. 그는 첩자들을 통해 수송마차 2천 대가 전날 도시에 들어와서 상당히 어수선하며, 한노는 식량을 추가로 공출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곧바로 도시를 공격하기로 했다. 다음날 새벽, 로마군은 가파른 언덕 위에 있고 잘 요새화된 카르타고 진영을 공격했다. 그러나 적이 생각보다 빨리 젼열을 가다듬어 거세게 반격하는 바람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결국 후퇴하여 동료 집정관 풀케르의 지원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군단병들은 후퇴하라는 신호를 무시하고 계속 공격하였고, 기어이 진영 안으로 침투하는 데 성공했다. 이걸 알게 된 플라쿠스는 후퇴 명령을 취소하고 계속 공격을 퍼붓게 했고, 한노의 군대는 크게 패하여 6천 명이 죽고 7천 명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2차 베네벤툼 전투)
이리하여 베네벤툼을 공략하고 카푸아에 전달될 예정이던 식량 수송부대를 모조리 탈취한 뒤, 그는 풀케르와 연합하여 카푸아 성벽에 접근했다.(카푸아 공방전) 한니발은 카푸아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자 즉시 진군하였고, 양측은 곧 결전을 벌였다. 한창 전투가 벌어지던 중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가 이끄는 분견대가 멀리서 나타났는데, 양측 모두 그들이 적군을 도우러 왔다고 여기고 전투를 중단했다. 이후 두 집정관은 한니발과 회전을 벌이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그날 밤 카푸아를 떠났다. 풀케르는 루카니아로 이동했고, 그는 쿠마이로 이동했다. 그들은 한니발이 한 쪽을 추격하여 카푸아에서 떨어뜨린 뒤 다른 쪽 부대로 카푸아를 재포위하기로 했다. 한니발이 풀케르를 추격하자, 그는 카푸아를 예정대로 포위하였다. 풀케르 역시 한니발이 마르쿠스 켄테니우스 페눌라의 로마군을 상대로 실라루스 전투에서 섬멸하느라 신경 못쓰는 틈을 타 카푸아로 돌아와서 그와 합류했다. 두 집정관은 카푸아 주변에 3개 요새를 설치하고 해자와 성벽으로 도시를 에워쌌다.
기원전 212-211년 겨울, 동생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가 법무관으로서 1차 헤르도니아 전투를 치렀다가 대패하는 바람에 재판에 회부되었다. 당시 카푸아를 포위하고 있던 그는 원로원에게 동생이 자신과 함께 카푸아 전투에 참가하게 해줄 것을 간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결국 그나이우스는 망명을 택해야 했다. 기원전 211년 임기가 만료되었지만, 원로원은 그들의 지휘권을 이듬해까지 연장하기로 했다.
한니발은 다시 카푸아를 구하러 달려왔고, 두 집정관은 도시 수비대와 한니발의 양면 공격을 받아야 했다. 풀케르는 카푸아인과 맞섰고, 플라쿠스는 카르타고군과 맞섰다. 그가 한니발의 맹공에 고전하면서도 버티는 사이[1], 풀케르는 카푸아 수비대를 성문으로 후퇴시켰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적을 맹렬히 추격하다가 왼쪽 어깨 아래에 창이 박히면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한니발은 적군의 포위망을 풀게 하려고 로마로 진군해 위협을 가했지만, 로마 측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카푸아를 운명에 맡기기로 하고 철수했다. 결국 카푸아는 오랜 공성 끝에 저항이 무익하다는 걸 깨닫고 항복했다.
로마군이 도시에 진입한 후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는 걸 지지한 53명의 인사들이 체포되었다. 풀케르는 이들의 처분을 원로원에 맡기자고 주장했지만, 그는 당장 처형하길 원했다. 풀케르는 중상을 입은 상태여서 그의 강력한 입장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고, 53명의 인사들은 티아나와 칼라에서 처형되었다. 그 직후, 풀케르는 부상이 악화되면서 사망했다. 이후 플라쿠스는 카푸아의 시민들을 노예로 팔았고, 도시에 속한 토지와 공공 건물을 로마의 소유로 삼았다. 원로원은 그의 모든 조치를 승인했지만, 카푸아와의 전쟁을 외적과의 전쟁이 아닌 내전으로 간주하여 개선식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후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가 사망하면서 폰티펙스 막시무스가 공석이 되자, 그는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와 그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다들 둘 중 하나가 그 자리를 맡을 거라 예상했지만, 놀랍게도 젊고 덜 유명한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크라수스는 이제 막 경력을 쌓기 시작했고 당시에는 행정관을 맡은 적도 없는 청년이었다. 그 후 기원전 210년 독재관에 선임되어 집정관 선거를 주관하였고, 기원전 209년 집정관에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함께 선출되었다. 호민관 가이우스와 루키우스 아레니아 형제가 "같은 사람이 집정관을 연속으로 맡는 건 온당하지 않다"며 비판했지만, 그는 기원전 217년 민회가 "이탈리아에 전쟁이 있는 동안, 이미 집정관을 맡았더라도 민중이 원한다면 몇 번이고 재선출될 수 있다"라고 결의하지 않았냐라며 묵살했다.
그는 루카니아 전선의 지휘관을 맡아 2개 군단을 지휘하여 한니발과 대적하였고, 여러 도시 주민들의 항복을 받아내고 카푸아 때와는 달리 그들을 잘 대해줬다. 이후에도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기원전 207년까지 남부 이탈리아에서 군사 활동을 수행하였고, 기원전 205년 원로원에서 아프리카에 군대를 파견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그는 이 회의에서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함께 군대를 아프리카에 보내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지만, 대부분의 원로원 의원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스키피오를 사령관으로 삼은 로마군을 아프리카에 보내기로 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데, 아마도 몇년 안 되어 고령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파테르쿨루스의 딸인 술피키아와 결혼하여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루키우스 만리우스 아키디누스 풀비아누스,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를 낳았다. 두 아들 퀸투스와 루키우스는 기원전 179년 나란히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또다른 아들 마르쿠스는 기원전 180년 트리부누스 밀리툼을 역임했지만 나중에 원로원에 의해 추방되었다.
[1] 한 때 중앙 대열이 돌파되어 전투 코끼리 3마리와 이베리아 병사 일부가 성벽 바로 앞까지 이르기도 했지만, 다른 전선에서 차출된 로마 별동대가 반격을 가해 코끼리들을 도랑에 빠뜨려 죽이고 이베리아인들을 축출하면서 가까스로 막아낼 수 있었다. 또한 누미디아 기병이 로마 진영에 침투한 뒤 "진영이 이미 함락되었으니 당장 도망쳐라"라고 소리쳤지만 로마군이 듣지 않고 반격하자 물러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