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라틴어: Appius Claudius Pulcher | |
생몰년도 | 기원전 97년 ~ 기원전 49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발칸 반도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조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아버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남동생)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남동생) 클라우디아 테르티아(누나) 클라우디아 콰르타(여동생) 클라우디아 퀸타(여동생) 세르빌리아(아내) 대 클라우디아(첫째 딸) 소 클라우디아(둘째 딸) |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54년 |
전임 |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
동기 |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
후임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루푸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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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군인, 정치인. 옵티마테스파 인사로, 카이사르의 내전 때 카이사르에 맞섰지만 얼마 안가 사망했다.2. 생애
2.1. 가문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명문가 중 하나인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그중에서도 '풀케르(Pulcher: 잘생긴)'라는 코그노멘을 쓰는 그의 가문은 아피아 가도의 건설자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장님')의 차남 푸블리우스부터 시작되었으며,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본가 역할을 했다.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기원전 249년 집정관을 맡아 릴리바이움 해전을 치렀다가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르는 바람에 함선 120척 중 93척이 격침되는 참사를 야기하고 말았고, 전투 전에 전투의 향방을 알아보기 위해 닭들이 모이를 쪼아먹는 의식을 진행하던 중 닭들이 쪼아먹질 않자 "먹기 싫으면 물이나 마셔라!"라고 외치며 바다에 던져버리는 짓을 하는 바람에, 무능과 불경죄로 재판을 받다가 판결 직전 자살했다. 여기에 여동생 클라우디아는 경기장에 참석했다가 평민들이 워낙 많이 있어서 좀처럼 빠져나가지 못하자 "오빠가 살아있었다면 이 쓸모없는 평민들을 다시 한 번 물속에 쳐넣었을 것을!"이라고 외쳤다가 고발당하여 거액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하지만 푸블리우스의 아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맹활약해 아버지의 불명예를 씻어냈다. 그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군대에 가담하여 기원전 213년부터 벌어진 시라쿠사 공방전에 참여했다. 뒤이어 기원전 212년 집정관을 맡아 로마와 동맹을 끊고 한니발 바르카와 연합한 카푸아를 응징하기 위한 원정을 이끌었다. 그는 동료 집정관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와 함께 2년간 카푸아 공방전을 치른 끝에 마침내 카푸아를 정복했으나, 그 과정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에게는 세 아들 아피우스, 푸블리우스, 가이우스가 있었는데, 모두 집정관을 역임했다. 아피우스는 기원전 185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푸블리우스는 기원전 184년, 가이우스는 기원전 177년에 맡았다. 또한 딸 클라우디아가 있었는데, 기원전 217년 카푸아의 행정관이었던 파쿠비우스 칼라비우스와 결혼했다.
기원전 177년 집정관을 역임한 가이우스의 장남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기원전 143년 집정관을 역임하여 알프스 부족인 살라시 족을 공격해 승리했다. 이후 딸 클라우디아를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결혼시켰으며, 그라쿠스의 농지 개혁에 찬성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기원전 133년에 살해되었고, 그는 기원전 130년에 뒤따라 사망했다. 그에게는 두 아들 가이우스와 아피우스가 있었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기원전 92년 집정관을 역임한 것 외에는 행적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아피우스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지지자로서 기원전 88년 법무관을 맡다가 가이우스 마리우스 일파에게 추방되었고, 기원전 84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가 죽자 로마로 돌아와 기원전 79년 집정관을 지냈고, 기원전 78년부터 기원전 76년까지 마케도니아 총독을 지내다 기원전 76년 마케도니아에서 사망했다.
기원전 79년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에게는 세 아들과 세 딸이 있었다. 큰아들 아피우스가 이 문서의 주인공이며, 차남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행적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삼남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훗날 평민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로 개명하고 로마의 악명높은 정치깡패가 되었다. 장녀 클라우디아 테르티아는 기원전 68년 집정관을 역임한 퀸투스 마르키우스 렉스와 결혼했다. 차녀 클라우디아 콰르타는 기원전 60년 집정관을 역임한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와 결혼했으며, 삼녀 클라우디아 퀸타는 로마의 명장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와 결혼했다.
2.2. 초기 경력
기원전 97년에 출생한 그는 기원전 76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장자로서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을 이끌었다. 기원전 75년 권력 남용 혐의로 기소된 아울루스 테렌티우스 바로를 직접 고발했으며, 기원전 72년 루쿨루스가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원정에 착수했을 때 부관으로서 함께 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가 루쿨루스와의 전쟁에서 연전연패한 후 아르메니아로 망명하자, 루쿨루스는 그를 아르메니아에 사절로 보내 미트리다테스 6세를 넘기라고 요구하게 했다. 그는 안티오키아에서 티그라네스 2세를 만나 "루쿨루스의 개선식에 참석할 미트리다테스를 맞이하거나 당신에게 선전포고하기 위해 왔다"라고 말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티그라네스 2세는 젊은이의 당찬 태도에 충격받았지만 미트리다테스 6세를 인도하는 걸 거부했다고 한다.기원전 63년 원로원 의원이자 사제단 일원이었던 그는 아우구리움 살루티스(augurium salutis)를 맡아 새점을 통해 신들에게 로마인들의 번영을 위해 상서로운 징조를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별다른 징조가 없자, 그는 "유감스럽고 비참한 내전이 곧 발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예측은 현실이 되어 그해 말 카틸리나 음모가 폭로되어 수천 명의 카틸리나 추종자들이 진압군과 맞서 싸우다 전원 사살되었다. 기원전 63년 12월 5일 카틸리나의 운명을 결정한 원로원 회의 때 의사록을 작성한 이가 바로 그였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61년, 동생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가 여자들만 출입 가능한 여신전에 잠입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을 때, 그는 그리스의 여러 사원과 공공 장소에서 예술 작품을 구입해 로마로 보내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가 동생을 구하기 위해 특별한 활동을 했다는 걸 암시하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2.3. 고위 행정관 경력
기원전 58년 당시 집정관 중 한 명인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의 지원으로 법무관에 올랐다. 그는 키케로가 집정관 시절 로마 시민을 재판없이 부당하게 죽인 것을 고발한 동생 클로디우스를 지지하여, 키케로의 추방을 이끌어냈다. 기원전 57년 키케로의 귀환 문제가 거론되었을 때, 그는 법무관 중 유일하게 반대했고,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되어 있던 1월 23일 민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그러나 키케로가 그해 귀환하는 걸 막지 못했다. 그는 이후에도 동생을 계속 지원하여 기원전 56년 클로디우스가 조영관을 맡게 하였다.기원전 56년경 사르데냐 속주 총독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54년에 루카에서 열린 삼두정치파 회의에 참석했다. 그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함께 집정관을 맡은 그는 그해 2월 유프라테스 강변 도시에 대한 콤마게네 국왕 안티오코스 1세의 주장을 지지했다. 그러나 키케로는 그가 막대한 뇌물을 받았기 때문에 안티오코스 1세를 옹호하고 있다고 주장했고, 결국 그의 주장은 통과되지 못했다.
동료 집정관 아헤노바르부스가 시리아 총독을 역임한 아울루스 가비니우스를 탄핵했을 때, 그는 아헤노바르부스의 운명을 결정하기로 되어 있던 민회를 연기하는 등 교묘하게 훼방을 놨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가비니우스에게 등을 돌렸고, 가비니우스가 "로마 국민의 존엄성을 모욕했다"며 또다른 고발을 제기해 망명하게 만들었다. 한편, 그는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 전임 총독 가이우스 폼프티누스가 알로브로게스 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으니 개선식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여 관철시켰는데, 일각에서는 오랫동안 개선식 자격이 인정되지 못했던 폼프티누스가 그에게 막대한 뇌물을 줬을 거라고 주장했다.
기원전 54년 여름, 이듬해 집정관 선출을 위한 선거가 열렸다. 이 선거에는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루푸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그리고 가이우스 멤미우스가 출마했다. 그는 현직 집정관으로서 선거 운동을 공정하게 이끌어야 할 책무가 있었으나, 스카우루스, 루푸스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고 그들을 돕기로 했다. 아헤노바르부스 역시 멤미우스와 칼비누스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고 그들을 지원하기로 약속하고, 만약 그들이 집정관 수행 후 예정된 속주를 배정받지 못할 경우 각각 4천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일이 발각되면서 두 집정관들의 명예는 실추되었지만, 이렇다할 징계를 받지 않았다.
집정관 임기가 끝난 후, 그는 킬리키아 속주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기원전 53년부터 51년까지 2년간 총독을 맡았다. 첫해에 이민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어 아파메아와 라오디케아에서 승리를 기념하는 주화를 주조했으며, 키케로는 편지에서 그가 군인들로부터 임페라토르로 추앙받았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이후에는 2개 군단이 큰 손실을 입었고, 급여 지급이 지연되면서 병사들이 반감을 품었다. 결국 기원전 51년 병사들이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그는 급히 밀린 돈을 지급한 뒤 로마로 떠났다. 뒤이어 킬리키아 총독에 부임한 키케로는 친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아피우스가 불법적인 세금을 부과하여 빼앗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빼앗아서 킬리키아를 완전히 망쳐놓았다"며 분노를 토로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는 이탈리아에 도착한 뒤 개선식을 개최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호민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는 "로마인의 존엄성을 모독했다"는 혐의로 그를 법정에 세웠다. 그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개선식을 포기하고 법정에 출두해야 했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는 그를 변호했고, 돌라벨라는 키케로와 마르쿠스 카일리우스 루푸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실패했다. 그 결과, 그는 무죄 판결을 받아낼 수 있었다.
2.4.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의 행적
기원전 50년 감찰관을 맡은 그는 카이사르의 지지자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를 원로원에서 추방했고, 뒤이어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도 추방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또한 기원전 55년 호민관을 맡았던 가이우스 아테우스 카피토를 "가상의 후원자"라고 비난했으며, 젊은 시절에 그리스 전역에서 귀중한 예술품을 수집했던 사람답지 않게도 사치품 구입을 엄격히 단속하고 그림과 동상에 대한 지출 제한 정책을 추진했다.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폼페이우스 편에 서서 발칸 반도로 망명했고, 폼페이우스로부터 그리스 총독에 선임되었지만 얼마 안가 병으로 사망했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그는 델포이 신전에 찾아가 내전의 결과가 어찌 될지 물었는데, "로마야, 이 전쟁은 너에게 무익하다. 너는 에우보이아, 광대한 분지의 깊숙한 곳에서 홀로 평화롭게 잠잠해지리라."라는 신탁을 받고, 전쟁에 참여하지 말라는 충고로 받아들여 에우보이아로 떠난 뒤 그곳에서 곧 사망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