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아우트로니우스 파이투스 라틴어: Publius Autronius Paet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에페이로스 |
지위 | 플레브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미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무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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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에 당선되었지만 뇌물 수수 혐의로 무효 처리되었다. 이후 카틸리나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추방되었다.2. 생애
행정관을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플레브스 집안인 아우트로니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젊었을 때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와 함께 그리스에서 유학 생활을 했고 기원전 75년경 키케로와 함께 재무관을 맡았다. 기원전 73년 크레타에서 해적과 맞서 싸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크레티쿠스[1] 휘하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을 맡았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집정관과 다른 고위 행정관 사이의 최소 재임 간격을 설정한 법에 의거한다면, 그는 기원전 68년 이전에 법무관을 맡았을 것이다.기원전 66년 집정관 선거에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함께 당선되었다. 그러나 낙선한 두 후보 루키우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와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가 그와 아우트로니우스를 뇌물 수수 혐의로 기소하였고, 그는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집정관 자격을 박탈당한 뒤 원로원에서 추방되었다. 기원전 66년 집정관 임기 마지막 날, 카틸리나가 포로 로마노에서 무장했다는 보고가 원로원에 보고되었지만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재판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훗날 카틸리나가 그날 집정관을 살해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카틸리나가 이듬해 집정관으로 선임된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와 루키우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를 죽이려 했다는 주장이라고 보지만, 일부 학자들은 현직 집정관 레피두스와 툴루스의 암살을 계획했다는 이야기라고 본다. 하지만 키케로의 이 주장은 카틸리나가 오래 전부터 무장 봉기를 꾀했다고 몰아가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다. 만약 이 음모가 사실이라면, 그 역시 가담했을 가능성이 있다.
기원전 64년 12월, 호민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루푸스가 선거법 위반에 대한 처벌을 완화할 것을 제안했다. 이 법안이 통과되었다면, 파이투스는 원로원으로 복귀할 수 있었을 테지만 루푸스가 곧 법안을 철회하면서 실패했다. 기원전 63년, 그는 카틸리나 음모에 연루되었다. 키케로는 파이투스가 9월 집정관 선거 기간 동안 마르스 광장에서 학살을 자행할 계획을 세웠으며, 11월 6~7일 밤 회의에 참석해 에트루리아를 손아귀에 넣고 반군의 거점으로 삼는 임무를 맡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가 무장한 2명을 키케로의 집에 침입해서 키케로를 살해하려 했다는 음모를 꾸민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기원전 63년 12월 3일, 카틸리나 추종자들과 접촉했던 알로브로케스 족 사절단이 원로원 회의에 이들의 음모를 고발했다. 이때 그들은 주요 공모자 중 파이투스도 있다고 밝혔다. 다음날 루키우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는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도 카틸리나 음모에 가담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원로원은 파이투스를 비롯한 음모자들이 크라수스의 권위를 빌려 추종자들을 늘리려고 수작을 부렸다고 여기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로마에 있던 음모자들은 즉각 체포된 뒤 12월 5일에 재판 없이 처형되었지만, 파이투스는 로마에 없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기원전 62년, 그는 카틸리나 공모자들의 반란이 진압된 후 체포된 후 함께 집정관에 당선되었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함께 로마에서 재판을 받았다. 두 사람 모두 키케로에게 변호를 요청했지만, 그가 음모에 깊게 관여했다고 확신한 키케로는 술라만 변호했고, 파이투스를 강하게 공격했다. 결국 술라는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그는 유죄를 선고받고 전 재산을 잃고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에페이로스에서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33년 보결 집정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아우트로니우스 파이투스가 그의 아들이라는 설이 제기되나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1]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아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