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 라틴어: Quintus Caecilius Metellus Nepo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조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발레아리쿠스(아버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양자)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98년 |
전임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
동기 | 티투스 디디우스 |
후임 |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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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라치오 인근의 팔레스트리나(Palestrina) 시를 건설했다는 전승이 전해지는 불카누스(Volcanus, 불의 신)의 아들 카이쿨루스의 후예로 전해지는 카이킬리우스 가문의 일원이다. 이 가문은 기원전 3세기부터 로마에서 출세가도를 달려 집정관 계급까지 오른 평민 귀족(노빌레스) 집안이었다. 조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는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과 아카이아 전쟁에서 활약하고 기원전 143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 마케도니쿠스의 장남이자 그의 아버지인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발레아리쿠스는 발레아레스 제도를 정복해 '발레아리쿠스(Balearicus: 발레아레스 정복자)'라는 아그노멘을 수여받았으며, 기원전 123년에 집정관을 역임하고 기원전 120년에 감찰관을 역임했다.학자들은 로마 행정관의 법적 취임 가능 연령 제한을 설정한 빌리우스 아닐리스 법에 의거해 그가 기원전 101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기원전 99년, 지난해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에 의해 국외 추방된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의 귀환을 여러 귀족과 함께 요구했으나 호민관 푸블리우스 푸리우스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되었다. 그는 많은 친척들과 함게 푸리우스를 찾아가 결정을 재고해달라고 청했지만, 푸리우스는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기원전 98년 티투스 디디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된 그는 누미디쿠스의 귀환을 성사시켰다. 또한 민회가 법안을 다루는 것에 대한 법안인 "카이킬리아-디디아 법(lex Caecilia Didia)"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르면, 서로 다른 법안을 하나의 패키지로 결합해서 통과시키는 것은 금지되었으며, 제안된 법안의 첫번째 개시일과 투표일 사이에 최소 "3번의 눈디나에(nundinae)"의 기간을 두어야 했다. 눈디나에(nundinae)는 당시 사용되던 로마 달력의 한 주로, 1주는 8일이므로 3번의 눈디나에는 24일이다. 이는 농촌 주민들이 법안에 익숙해지고 투표에 참여할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포풀라레스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민중을 선동하여 법안을 즉결 통과시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집정관 임기를 마친 직후, 그는 젊은 귀족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1]에게 고발당했다. 혐의가 무엇이었고 재판 결과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로마의 문헌학자 아스코니우스 페디아누스는 그가 임종할 때 아들에게 쿠리오에게 복수할 것을 부탁했다고 밝혔으나 사실 여부는 불확실하다.
학자들은 오랫동안 그가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와 이혼한 리키니아 카이킬리아와 결혼해 기원전 57년 집정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를 낳았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 학계는 이 인물이 기원전 90년 호민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의 아들이며 그에게 입양되었다고 결론내렸다.
[1]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측근으로서 카이사르의 내전에서 아프리카 원정을 맡았다가 전사한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의 아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