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 라틴어: Gaius Norbanus Flacc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
지위 | 플레브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가이우스 노르바누스(조부) 가이우스 노르바누스(아버지)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38년 |
전임 | 가이우스 코케이우스 발부스 푸블리우스 알페누스 바루스 |
동기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
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켈리오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해방자 내전에서 제2차 삼두정치파에 가담하여 필리피 전투를 치렀으며, 옥타비아누스의 휘하에 들어가 집정관을 역임한 뒤 스페인과 아시아 총독을 맡았다.2. 생애
조부 가이우스 노르바누스는 마리우스파 인사로 기원전 83년 집정관을 맡아 술라의 내전을 일으킨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 대적했다. 그러나 패배를 면치 못한 후 로도스에 달아났다가, 술라가 로도스 시민들에게 자신을 넘겨주지 않으면 강경 대응하겠다고 협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시내 광장에 나아가 자살했다. 아버지 가이우스 노르바누스는 조부와 함께 술라에 대적했으나 패배한 뒤 은거했다. 이후 자신에게 대항했다가 숙청 명단에 오른 자들과 후손들의 로마 시민권을 영구적으로 박탈하는 조치가 내려지면서, 그는 로마 정계에 활동할 수 없었다.그러던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을 단행한 뒤 권력을 장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숙청 명단에 오른 이들의 후손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돌려주고 정치 활동을 할 수 있게 해주면서, 그는 비로소 정치 경력을 시작해 기원전 44년 또는 43년경에 루키우스 세스티우스와 함께 동전 주조관을 맡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후 카이사르파와 '해방자'를 자처한 카이사르 암살자들간의 분쟁이 벌어지자, 그는 카이사르파를 지지했다.
기원전 42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그와 루키우스 데키디우스 삭사에게 8개 군단을 맡기고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이끄는 적군의 진군을 저지하게 했다. 두 사람은 발칸 반도에 상륙한 뒤 에그나티우스 가도를 차단하여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넌 적군이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로 행진하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트라키아 부족의 왕 한 명이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에게 우회로를 알려줬고, 그들은 즉시 그 길을 통해 적의 배후로 이동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노르바누스와 삭사는 별 수 없이 필리피 서쪽으로 퇴각했다. 이윽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주력군이 바다를 건너 일리리아 해안가에 상륙한 뒤 선봉대와 합세했고, 그는 뒤이은 필리피 전투에 참가했다. 1차 전투를 치른 후 옥타비아누스가 중병에 걸려 군대를 이끌기 어려워지자, 그가 옥타비아누스를 대신해 군대를 통솔하여 승리에 일조했다.
기원전 38년, 노르바누스는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두 집정관은 그 해 중반에 보결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켈리오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로 교체되었다. 기원전 36년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의 뒤를 이어 히스파니아 총독에 부임해 기원전 34년까지 그곳을 다스렸다. 그 기간 동안 모종의 부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그는 로마에 돌아와서 기원전 34년 10월 12일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격파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세력권이었던 아시아 속주를 통제하기 위해 그를 아시아 총독에 선임했다. 그는 기원전 27년까지 아시아를 다스렸다. 그는 페르가몬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자금을 보낼 수 있는 권리를 재확인해줬고, 유대인들은 그에게 보답하고자 동상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총독 임기를 마치고 로마에 돌아온 그는 기원전 25년 원로원 결의에 서명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의 아들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24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