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0 21:41:26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기원전 34년 집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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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라틴어: Lucius Scribonius Libo
파일: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jpg
생몰년도 기원전 90년 ~ 미상
출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사망지 미상
지위 평민 귀족(노빌레스)
국가 로마 공화국
가족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아버지)
센티아(어머니)
코르넬리아 술라(아내)
스크리보니아(딸)
스크리보니아(이복 누이 또는 둘째 딸)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아들)
마르쿠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드루수스(아들)
참전 카이사르의 내전
직업 로마 공화국 집정관
로마 공화정 집정관
임기 기원전 34년
전임 루키우스 코르니피키우스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1]
섹스투스 폼페이우스[2]티투스 페두카이우스
동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루키우스 셈프로니우스 아트라티누스
후임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이우스 멤미우스마르쿠스 헤렌니우스 피켄스

1. 개요2. 생애3. 가족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군인, 정치인.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 옵티마테스 파 장성으로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상대로 해전에서 활약했다. 이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부하가 되어 해전에서 계속 활약했으나, 섹스투스가 몰락하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귀순했다.

2. 생애

기원전 3세기에 다른 이탈리아 도시에서 로마로 이주한 평민 씨족인 스크리보니우스 일족의 일원이다. 스크리보니우스 가문은 그 어원이 스크리보의 아들을 뜻한다.

스크리보니우스 일족 중 하나인 리보 가문의 코그노멘 "리보"는 "신주에 무언가를 붓다"라는 의미이나, 동시에 리비우스 가문의 리비아를 변형 표기한 코그노멘이기도 하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가문은 실제 그 기원이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에서 입양된 남성부터 시작됐고, 이 남성은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와 수대에 걸쳐 상호 결혼으로 거의 한몸이었던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레피두스 가의 피도 흐른 사람이었다.[3] 따라서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의 친척 중 한명인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가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에 입양될 때, 양자들이 일반적으로 취한 '-anus' 형태의 스크리보니아누스를 취하지 않은 것 역시 이런 리보 가문의 역사와 관련 있었다는 평이 있다.

동명의 아버지는 기원전 90년 시칠리아에서 재무관, 기원전 80년 법무관을 지냈다. 어머니 켄티아는 기원전 19년 집정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기원전 90년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71년 또는 54년에 화폐 주조 책임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 기록에는 시칠리아에서 재무관을 역임한 리보와 로마에서 열린 대회를 주최한 조영관 리보가 언급되는데, 두 사례 모두 그를 가리키는 것일 가능성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아우구스투스의 두번째 아내였던 스크리보니아의 아버지는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로 알려졌다. 이 인물이 기원전 80년 법무관 루키우스 스키보니우스 리보이며, 기원전 34년 집정관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는 그녀의 이복 누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가설이지만, 고대 로마 여성의 삶을 연구한 서양 고전학자 일레인 펜섬(Elaine Fantham, 1933 ~ 2016)은 2006년에 출간한 저서 <율리아 아우구스티: 황제의 딸(Julia Augusti: The Emperor's Daughter)>에서 스크리보니아가 리보의 이복 누이라고 하기엔 기원전 90년경에 출생한 리보와 나이 차가 너무 많이 나며, 서기 16년에도 살아있었던 것이 고대 기록상에서 확인되는 만큼 비현실적이라면서, 스크리보니아는 기원전 34년 집정관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의 둘째 딸이라고 주장했다. 이 가설은 현재 여러 학자들로부터 일리있는 주장이라는 평을 받고 있으나, 아직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그는 독재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유일한 아들인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폼페이우스의 딸인 폼페이아 마그나의 딸인 코르넬리아 술라와 결혼했다. 폼페이우스의 친구이자 정치적 동맹자였으며, 딸 스크리보니아를 폼페이우스의 차남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결혼시키기도 했다. 기원전 56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파라오에 복귀시키기 위해 폼페이우스를 이집트로 보내자는 푸블리우스 푸블리우스 플라우티우스 깁시우스의 제한을 지지했고, 폼페이우스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1년 후 그가 포미아 거주민인 헬비우스 만사의 고발을 물리치는 데 도움을 줬다. 고발의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가 거액의 부채를 진 것과 관련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49년 1월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그는 에트루리아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주민과 병사들이 전부 카이사르를 지지하는 바람에 카이사르의 부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상대로 제대로 맞서지 못하고 쫓겨났다. 이후 캄파니아에서 폼페이우스를 위해 모집된 신병들을 이끌어 브룬디시움으로 향했다. 브룬디시움에서 친구이자 카이사르파 인사인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와 접촉해 평화를 협의하고자 하니 중재해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여 폼페이우스에게 전달했지만, 폼페이우스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휘하에 들어가 카이사르군이 배를 타고 발칸 반도로 넘어가는 걸 막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임무를 착실히 수행했지만, 카이사르군이 항구 도시를 모조리 장악하면서 함대 보급품이 다 떨어져가자 오리쿰에서 카이사르에게 휴전 협상을 제의했다. 카이사르가 휴전에 응할 테니 그쪽은 해양 봉쇄를 풀고 자신들은 항구를 풀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는 별다른 대꾸 없이 휴전부터 하자고 답했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그들이 함대에 재보급하려고 시간을 끌고 있다고 여기고 협상을 중단했다.

기원전 48년 초 비불루스가 해상에서 사망하자, 그는 50척의 갤리선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었다. 그는 오리쿰을 계속 봉쇄하다가, 이탈리아의 항구 도시 브룬디시움을 봉쇄하면 카이사르와 지원군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다른 함대를 다른 곳으로 배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브룬디시움으로 쳐들어가서 여러 척의 수송선을 불태우고 항구 입구에 위치한 섬에 군대를 상륙시켰으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한 개 분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절묘한 계략으로 봉쇄를 풀었다. 몇몇 선박을 보내서 적 함대가 그쪽에 관심을 집중시켜 추격하도록 한 뒤, 매복하고 있던 다른 함대를 출격해 그들을 덮친 것이다. 그는 겨우 후퇴할 수 있었지만, 섬에 상륙했던 병력은 모조리 사로잡혔다. 그렇게 그를 격파한 안토니우스는 무사히 아드리아 해를 건너 일리리아에 도착했다.

폼페이우스가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패한 뒤 이집트로 망명했다가 피살된 후, 그는 카이사르와 화해하고 이탈리아로 돌아가 몇년간 조용히 지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키케로,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와 교류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자, 히스파니아에서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사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기원전 43년 키케로가 처단당하고 제2차 삼두정치파가 그를 숙청 대상에 올리자, 그는 이탈리아를 탈출한 뒤 시칠리아를 장악한 섹스투스와 합류했다.

기원전 40년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및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 간의 페루시아 내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그는 안토니우스와 폼페이우스 사이의 동맹을 맺을 목적으로 안토니우스의 어머니 율리아와 함께 그리스로 가서 안토니우스를 설득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어머니의 설득에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길 거부했다.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그에게 결혼 동맹을 제의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이고 이부누이 또는 둘째 딸인 스크리보니아와 옥타비아누스를 결혼시켰다. 스크리보니아는 옥타비아누스의 유일한 혈육인 대 율리아를 낳았다.

기원전 39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사이의 평화 협상이 이어진 끝에 미세눔 조약이 체결되었다. 섹스투스의 추종자들과 공화파들은 시민권을 되찾았으며, 섹스투스가 이미 점령하고 있던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시칠리아에 더해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추가로 얻게 되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내주는 걸 차일피일 미루는 바람에, 실제로 얻지는 못했다. 한편 그는 평화 협상을 중재한 대가로 차기 집정관을 약속받았다.그리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딸이자 그의 손녀인 폼페이아가 옥타비아누스의 조카인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약혼했다.

그러나 폼페이아와 마르켈루스의 결혼은 이뤄지지 않았다. 곧 옥타비아누스와 폼페이우스 사시에 새로운 전쟁이 벌어졌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초기엔 옥타비아누스 해군을 상대로 잇따라 대승을 거뒀지만, 옥타비아누스의 심복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함대를 이끌고 반격을 가하여 승리를 거둔 데다 일전에 섹스투스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에게 "레피두스를 배제하고 나를 삼두의 일원에 끼워넣어라"라고 제안한 것에 원한을 품고 있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시칠리아에 상륙한 뒤 섹스투스의 육군을 상대로 승리하면서 전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섹스투스는 아시아로 도피했고, 그는 이를 따라갔다. 그러나 그는 곧 섹스투스에겐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보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편으로 넘어갔다.

기원전 34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으며, 안토니우스가 1월 1일 하루만 집정관을 맡고 물러난 뒤 루키우스 셈프로니우스 아트라티누스와 함께 집정관을 맡았다. 그러나 7월 1일 아트라티누스와 함께 집정관에서 물러났고,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이우스 멤미우스가 보결 집정관에 부임했다. 나중에 멤미우스 역시 9월이나 11월에 물러났고, 마르쿠스 헤렌니우스 피켄스가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집정관에서 물러난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3. 가족

후일 황제가 되는 갈바의 고모 할머니뻘인 술피키우스 가문 출신인 이름 미상 아내와 결혼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세 자녀를 뒀는데, 상술한대로 장녀 스크리보니아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결혼했다. 위에서 봤듯이 아우구스투스의 둘째 아내이자 대 율리아의 어머니였던 스크리보니아가 그의 둘째 딸이라는 가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사실 여부는 불명확하다. 아들은 서기 16년 집정관을 지낸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와 마르쿠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드루수스가 있다.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리비아 드루실라의 남동생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4] 역시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의 아들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는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의 아들이 아닌 인물로, 대체로 추정한다.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 등을 보면,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는 '루키우스의 아들(L.F.)'이나, 리비아 드루실라의 아버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가 본인 친가 쪽 혈육을 본인의 양자 겸 상속자이자, 본인보다 먼저 전사해 죽은 가이우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법적 형제 겸 손자 형태로 지명해 입양했다고 나와 있다. 또 그는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의 이복누나로 아우구스투스의 전처 스크리보니아의 친척뻘 조카로 언급돼 기원전 34년 집정관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의 친아들이라는 표현이 없다. 따라서 그는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의 아들인지 불분명하며, 아니라는 평을 듣는다. 다만, 그는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와 분명 혈연적 관계가 어쨌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의 차남에게 유언장을 통해 본인의 코그노멘이자 리보 가문의 혈통적 본가라고 할 수 있는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의 코그노멘 드루수스를 쓰게 해줬다고 한다. 하지만 후술할 사건으로 그 허락은 무효화됐다.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의 맏이 루키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동생인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의 추천, 서기 14년 제위를 물려받은 티베리우스 황제의 신임으로 서기 16년 집정관을 지냈다. 하지만 그는 티베리우스 황제가 제위를 물려받기 전인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모종의 이유로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를 암살할 음모를 세운 것이 발각됐다며 델라토르들에게 고발됐다. 이때 함께 기소된 동생 마르쿠스와 공범으로 묶였으며, 서기 16년 9월 13일 처형됐다.

차남 마르쿠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드루수스는 보통 리보 드루수스로 불리는 사람이다. 리보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터무니없는 취향을 가진, 어리석은 뚱보 청년"으로 불렸다. 그는 리비아 드루실라,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에게 출신 가문이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에서 갈라져 스크리보니우스 가문에 들어간 리보 가문 출신이라는 이유 등으로 형처럼 황실의 비호를 받았다. 그는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에게 오직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남녀 황족 및 아우구스투스의 처가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에서만 허용된 드루수스를 물려 쓸 특권까지 받았다. 하지만 그는 형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와 함께, 서기 16년 반역죄로 기소됐고 이 사건으로 목숨을 잃었다.

리보 드루수스가 형과 함께 기소된 혐의는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를 암살할 음모를 세운 것이 발각됐다는 이유였다. 여기에는 그가 점쟁이에게 돈을 주고 브룬디시움이나 브린디시까지 아피아 가도를 포장할 수 있을 만큼 부자가 될 수 있는지 묻는 것도 포함됐다. 그래서 티베리우스 황제를 혐오한 타키투스는 리보 드루수스 형제가 기소된 것을 "터무니없고 무의미한 것"이라며 티베리우스가 오로지 정적 제거를 위해 생사람을 잡아 처형했다고 평한다. 어쨌든 그는 티베리우스 황제, 리비아 드루실라,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 모두에게 이 일로 진노를 샀고, 반역죄로 기소되자마자 원로원에서 열린 상설 반역재판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는 젊을 적부터 뚱뚱해서 몸이 아프다는 이유 등으로 자비를 간청했다. 그의 외삼촌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퀴리누스가 이때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의 두 아들을 변호하면서 오해를 풀어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점쟁이에게 돈을 억지로 쥐어주면서 점을 쳐달라는 것은 넘기더라도, 그가 티베리우스 본인과 아버지 아우구스투스, 어머니 리비아, 외숙부 드루수스 리보 모두의 호의에도 오랜 기간 음모를 꾸민 혐의가 명확함에도 반성하지 못한다고 맹비난했다. 그래서 리보 드루수스 형제는 이 일로 티베리우스에게 더욱 격노를 샀는데, 티베리우스는 리보 드루수스의 노예를 고문해 자백을 받아도 증거로 쓸 수 없는 로마법과 모스 마이오룸 때문에, 리보 드루수스의 노예들을 재무부 관료에게 판 다음, 그들에게 재판에서 고문없이 자백으로 증거를 받아내 다시 기소한 다음, 그들을 재차 증인으로 삼아 유죄를 선고했다.

이 과정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전처 스크리보니아는 본인의 이복형제 또는 아버지인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의 두 아들인 리보 드루수스 형제 중 마르쿠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드루수스에게 결백을 증명하면서 자살하지 말고 재판을 당당히 받으라고 했다. 그러나 마르쿠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드루수스는 재판을 받아도 유죄 증거가 명확해졌고, 강제로 소유권을 빼앗긴 뒤 해방노예가 되어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주장한 옛 노예들 때문에,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다고 절망했다. 그래서 그는 유죄 판결 선고가 있을 서기 16년 9월 13일, 재판정 출석을 앞두고 자신의 배를 두 번 찔러 자살했다. 그가 자살하자, 티베리우스 황제는 반역자가 비겁하게 명예로운 방법으로 죽었다면서, 원로원에게 리보 드루수스를 기록말살형에 처하게 해달라고 촉구했다. 로마 원로원은 그의 기록말살형을 승인했고, 반역법에 따라 그의 재산은 증인으로 나서 옛 주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노예들과 델라토르들, 티베리우스 황제 손아귀에 떨어졌다. 이후 자살하지 않고 끝까지 무죄를 주장한 리보 드루수스의 형 루키우스는 곧바로 처형됐다. 그리고 9월 13일은 공휴일로 선포됐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가문은 서기 16년의 일로 풍비박산났다. 직접 반역자로 찍히고, 기록말살형까지 처해진 마르쿠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드루수스는 동상, 장례용 가면이 모두 파괴됐고, 후손들의 장례 행렬 역시 사실상 금지됐다. 또 티베리우스 황제의 입법안에 따라, 스크리보니우스 씨족 가문은 영원히 드루수스라는 이름을 갖지 못하게 됐고,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의 후손을 주장하는 것도 금지됐다. 따라서 스크리보니우스 가문의 구성원들이 '드루수스'라는 이름을 쓰는 걸 금지된 뒤부터 예전 같은 위세를 떨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티베리우스 사후, 리보 가문은 오명 일부를 벗게 됐다. 칼리굴라가 자신의 할머니 소 안토니아, 숙부 클라우디우스 1세, 세 여동생이 티베리우스 명으로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직계 상속권을 제한받은 것을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유언장 조치로 복구시킬 때 오명을 일부 벗게 된 것이다. 그러나 리보 가문은 여전히 드루수스라는 이름을 쓰지 못했다. 다만, 제정 시대 이후에도 여러 남성이 입양 형태로 다른 가문으로 들어가거나, 여성이 시집을 갔다. 그 중 한 여성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절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가문과 칼푸르니우스 피소 가문의 결합으로 완성된 대귀족일가로, 서기 1~3세기 까지 권세를 누린 크라수스 피소 푸르기 가문에 시집 갔는데, 그 여성은 기원전 34년 집정관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의 손녀였다. 그리고 이 손녀의 피를 이은 후손이 대 파우스티나 황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소 파우스티나 황후, 콤모두스 황제의 직계조상들이다. 그래서 서기 1 ~2세기 로마 제국을 지배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황실은 리보 가문의 피를 이었고, 방계 황족들은 자신들의 코그노멘으로 리보를 붙여 자랑스럽게 가문의 지파 성씨로 활용했다.[5]


[1]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와 동명이인이다.[2]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동명이인이다.[3]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는 스크리보니우스 가문에 첫 리보 가문을 개창한 인물 등을 입양보냈지만, 포에니 전쟁 당시 가문 남성이 더이상 없게 됐다. 그래서 그들과 수대째 친인척인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가 소년을 입양했고, 이를 시작으로 가세를 다시 키웠다. 혈연상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의 동생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아이밀리아누스가 그 소년인데, 그의 두 아들이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이우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이며, 손자는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이다. 참고로 리비아 드루실라의 아버지는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외손자로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양자이자 외조카이다.[4] 리비아 드루실라의 아버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가 친아들 가이우스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내전 중 전사하고 손녀 2명만 있는 관계로 일찍이 입양해 키웠고, 유언장을 통해 리보 가문의 혈통적 시작점인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을 물려 받았다. 그는 법적 누나 리비아 드루실라, 매형 아우구스투스, 조카 티베리우스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이들과 신뢰가 매우 두터웠던 인물로 기원전 28년 안찰관으로 재임했고, 아르발 들판 형제 사제단 사제에 지명됐다. 또 매형 아우구스투스 대신 처남 자격으로 국가 명절 기념으로 열린 축전을 대신 이끌었다. 그는 딸 리비아 스크리보니아를 비롯해, 이름 미상의 아들들을 뒀다. 이름 미상의 아들의 딸로,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의 손녀 리비아 메둘리나 카밀라는 리비아 드루실라의 손자로 아우구스투스의 외종손이며 양손자 클라우디우스 1세의 신부로 간택됐다. 그러나 결혼 전 요절했다.[5] 포에니 전쟁 이후 히스파니아 지방을 차지한 때에 이 일대에 올리브 농장 등을 경영하고자 히스파니아로 건너갔다가 이탈리아로 재이민 온 노빌레스 중 하나인 안니우스 가문이 그들이다. 이 가문은 철인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본가이며, 대 파우스티나 황후의 친정이다.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작은아버지, 대 파우스티나의 남동생,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처남 마르쿠스 안니우스 리보와 그의 자녀들이 대대로 취한 리보는 그 의미 자체가 리보 가문의 피를 이었다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