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마리우스 라틴어: Gaius Marius | |
생몰년도 | 기원전 110년 또는 기원전 109년 ~ 기원전 82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프라이네스테(오늘날 이탈리아 팔레스트리나) |
지위 | 플레브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가이우스 마리우스(아버지) 율리아(어머니) 리키니아(아내)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82년 |
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
동기 |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
후임 | 마르쿠스 툴리우스 데쿨라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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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아들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 맞섰으나 끝내 패망했다.2. 생애
평민(플레브스) 출신으로 집정관을 7번이나 역임하며 킴브리 전쟁에서 로마를 구원한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아들이다. 어머니 율리아는 비너스 여신의 후예로 전해질 정도로 고대 로마에서 유서깊은 파트리키 집안인 율리우스 씨족의 일원이었다. 외삼촌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 유명한 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버지다. 친사촌인 마르쿠스 마리우스 그라티디아누스는 기원전 85년과 84년에 법무관을 역임하면서 화폐 순환을 안정시키기 위한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그는 아버지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50세에 접어들었던 기원전 110년 또는 109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루키우스 마닐루스 토르콰투스와 함께 그리스 유학을 떠났다. 이 중 아티쿠스는 평생 그의 친구로 남았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92년경 당대 최고의 연설가이자 기원전 95년 집정관, 기원전 92년 감찰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딸인 리키니아와 결혼했다.
기원전 90년 동맹시 전쟁이 발발했을 때 아버지의 군대에 복무하여 마리우스가 마르시 족에 대한 두 번의 승전을 거두는 데 일조했다. 기원전 89년 집정관 루키우스 포르키우스 카토의 휘하에서 복무했으나, 이번에는 마르시 족에게 참패해 카토가 전사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는 로마군이 패전의 여파로 혼란스러웠을 때 젊은 마리우스가 지휘권을 탈취하기 위해 카토를 죽였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기록들과 교차검증이 되지 않기에 학계로부터 근거없는 이야기로 간주된다.
기원전 88년 호민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는 동맹시 전쟁 이후 선거권을 얻은 이탈리아 유권자들이 기존의 35개의 투표 부족들에 공평하게 분배되도록 해 그들의 투표가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그들을 8개의 새로운 부족에 배치하려 했던 원로원은 결사 반대했고, 기존의 로마 시민들 역시 정치적 특권을 새로운 시민들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었기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이에 술피키우스는 마리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마리우스는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을 치를 지휘권을 자신에게 넘기는 조건하에 받아들였다. 술피키우스는 마리우스의 지원에 힘입어 법안을 통과시킨 뒤, 현직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동방 총사령관 지명을 철회하고 그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넘긴다고 선포했다.
놀라에서 군대를 사열하고 있던 술라는 지휘권이 박탈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해 병사들을 선동하여 자기 편으로 삼은 뒤, 마리우스가 인수인계를 하려고 보낸 장교를 현장에서 살해하고 6개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하여 단숨에 공략했다. 이후 술라는 가이우스 마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를 포함한 정적 12명을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고 누구든지 그들을 죽이거나 자신에게 끌고 올 수 있다고 공표했다. 젊은 마리우스는 아버지와 함께 로마를 탈출해 아프리카로 떠났다. 이때 아버지로부터 바다로 떠나기 위해 음식을 마련하라는 지시를 받고 콩 수레에 숨어서 로마에 있는 아내의 집으로 잠입한 뒤 아티쿠스로부터 자금을 제공받는 등 필요한 모든 것을 확보한 뒤 야간에 해안가로 가서 아프리카로 가는 배에 탑승했다.
아프리카 속주에 무사히 도착한 마리우스 부자는 누미디아 왕국의 국왕 히엠프살 2세에게 찾아갔다. 히엠프살 2세는 그들을 친절하게 영접해놓고 나중에 체포해서 술라에게 넘기려 했다. 하지만 마리우스 부자는 그의 계획을 눈치채고 도주했다. 플루타르코스, 아피아노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히엠프살 2세의 후궁 한 명이 젊은 마리우스와 사랑에 빠져 왕의 흉계를 전해주고 탈출시켰다고 한다. 그 후 마리우스 부자는 케르키나 섬에 들어가 겨울을 보냈다. 기원전 87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가 술라파를 삼대로 봉기하자, 마리우스 부자는 아프리카에서 사병을 끌어모은 뒤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그 해 말 로마에 입성한 마리우스는 대숙청을 단행했다. 일설에 따르면, 젊은 마리우스는 호민관 중 한 사람을 손수 쳐죽였다고 한다. 그 후 아버지 마리우스는 집정관에 선출되어 술라를 토벌할 준비에 착수했지만 기원전 86년 1월에 급사했다.
이후 수년간 별다른 행적을 보이지 않던 젊은 마리우스는 기원전 82년 집정관에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와 함께 선임되었다. 마리우스가 특별히 군사 통솔력이나 정치 수완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마리우스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 때문에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젊은 마리우스는 술라와 대결하기 위해 8개 군단을 이끌고 캄파니아로 내려갔고, 카르보는 이탈리아 북부로 진군하여 에트루리아, 움브리아, 갈리아 키살피나를 메텔루스 피우스와 폼페이우스의 침략으로부터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마리우스는 술라와 정면대결하는 대신 '사크리포르투스'로 알려진 미지의 장소로 숨었다. 술라는 휘하 병사들에게 마리우스를 쫓으라고 명령했으나, 온종일 지속된 추적 끝에 보좌관들이 수색 중단 명령을 내리고 그날 밤을 보낼 진지를 구축하도록 설득하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술라의 병사들이 숙영지 건설에 한창일 때, 젊은 마리우스는 병사들에게 천막을 치고 있는 적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술라의 장병들은 이 기습을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적군을 프라이네스테(오늘날 이탈리아의 팔레스트리나) 방향으로 몰아붙였다. 프라이네스테 주민들은 술라를 싫어했지만, 술라군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위험을 감수할 수 없다고 보고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마리우스와 소수의 군관들은 밧줄과 투석기를 써서 도시 안으로 들여보내졌지만, 나머지 병사들은 성벽 밑의 평원에 남겨졌다. 술라군은 이들을 공격해 젊은 마리우스가 누벽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적병들을 모조리 살육하다가 생존자들의 항복을 허락했다.
이후 도착한 술라는 계산된 잔혹성을 드러냈다. 그는 생존자들을 모두 모은 뒤, 삼니움족만 한쪽으로 몰아놓도록 했다. 무기를 뺏기고 사방으로 포위된 삼니움족은 술라의 명에 따라 그 자리에서 학살되었다. 그 후 술라는 일부 병력을 남겨 프라이네스테를 공격하도록 한 뒤,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했다. 젊은 마리우스는 카르보와 폰티우스 텔레시누스의 구원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지지자인 법무관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다마시푸스에게 전령을 보내 로마에 남아잇는 인사들에게 로마를 떠나 카르보와 합류하라는 지령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대피하기 전에 처리해야 할 사람들의 명단도 함께 보냈다. 브루투스는 숙청 명단을 확인한 뒤 원로원을 소집한 후, 자객들을 풀어 명단에 든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그 중에는 명망높은 연설가이자 폰티펙스 막시무스였던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도 포함되었다. 스카이볼라는 베스타 신전 안으로 피신했지만, 암살자들은 성역인 그곳에 침입해 그를 죽였다. 그렇게 살해된 이들의 유해는 티베리스강으로 던져졌다.
반술라파 인사들은 로마를 떠나 북쪽으로 달아났고, 술라는 도시에 입성한 뒤 남은 시민들을 소집하여 "나는 도살자가 아닌 외과의사가 될 계획이다. 몇 명의 적을 골라서 벌하긴 하겠지만, 나머지 주민은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밝혔다. 이후 믿을 만한 군관 몇 명과 소규모 수비대만 로마에 남긴 뒤, 북쪽으로 즉각 진군했다. 한편 폼페이우스와 메텔루스 피우스를 상대로 고전하던 카르보는 프라이네스테에 포위된 젊은 마리우스를 구원하여 술라를 북쪽과 남쪽에서 압박해야겠다고 판단하고, 아드리아 해안으로 철군한 뒤 그 도시를 구하러 갈 핵심 병력을 떼어냈다. 그러나 첫번째 구원군은 프라이네스테로 진군하던 도중에 폼페이우스의 기습으로 전멸했다.
얼마 후, 삼니움족과 루카니족이 힘을 합쳐 수만 병력을 일으켜 프라이네스테 포위를 풀려 했으나, 프라이네스테를 포위하고 있던 술라군이 이를 격퇴했다. 이렇듯 상황이 나빠지자, 카르보의 부관 한 명이 술라와 내통했다. 그는 중요한 일을 완수해낼 경우 관대한 처분을 받는다는 약속을 받고, 카르보의 군관 한 무리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이중에는 가이우스 노르바누스도 있었다. 노르바누스는 배반 가능성을 의심하고 참가하지 않았지만, 나머지 군관은 초대에 응했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모두 붙잡혀 처형되었고, 부관은 곧바로 술라 진영으로 달아났다. 노르바누스는 이제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로도스로 망명했다.
카르보는 갈수록 악화되는 전황에도 프라이네스테로 계속 파견대를 보냈지만, 부대가 그곳까지 가지도 못하고 궤멸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그러는 사이 메텔루스 피우스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가 갈리아 키살피나 전체를 에워쌌다. 이제 카르보는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은 가망이 없다고 여기고, 시칠리아를 거쳐 아프리카로 피신하기로 하고, 여러 군관에게 북부 이탈리아를 맡긴 뒤 변장한 채 달아났다. 카르보가 나긴 합동 사령부는 북부를 완전히 버리고 삼니움으로 피신하기로 했다. 그들은 남쪽으로 내려가 삼니움 장군 폰티우스 텔레시누스와 합세했다. 기원전 82년 11월 초, 삼니움족과 루카니족, 그리고 카르보의 잔여 부대는 프라이네스테 해방을 시도했지만 적의 강력한 방비로 인해 또다시 무산되었다.
이에 텔레시누스는 발상의 전환을 시도했다. 그는 로마와 자신들을 가로막은 군대가 없다는 점을 간파하고, 한밤중에 진지를 떠나 로마로 질주하여 술라가 미처 저지할 새도 없이 도시를 탈환하기로 했다. 이튿날 아침 동이 뜰 무렵, 로마 시민들은 4만 남짓한 병력이 콜리나 성문 밖에 진을 치고 있는 걸 발견했다. 술라파 지지자들은 그저 겁을 주기 위한 허세라고 보고, 병력을 모아 돌격했으나 곧바로 전멸했다. 로마 시는 공황에 휩싸였고, 텔레시누스는 콜리나 성문 앞에 서 있는 병사들에게 "이탈리아인의 자유를 유린한 저 늑대들은 그들을 품어주는 숲을 베어버리지 않는 한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연설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술라는 크게 뒤쳐져 있지 않았다. 그는 적군이 전날 밤에 진지를 비우고 로마로 진군한다는 걸 알게 되자 그들을 따라잡으러 쏜살같이 달렸다. 이윽고 정오쯤에 술라군이 등장하자, 텔레시누스는 곧바로 요격에 나섰다.
이리하여 벌어진 콜리나 성문 전투는 술라가 내전을 단행한 이래 가장 격렬한 전투였다. 술라가 직접 지휘했던 좌익 부대는 삼니움족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이에 술라는 프라이네스테로 전령을 보내 그곳 병사들에게 포위를 중단하고 아군을 구원하라고 전하게 했다. 그러나 그가 모르는 사이, 우익 부대를 이끌던 크라수스가 적군을 격파하고 진영을 함락시켰다. 술라는 수 시간이 지나서야 크라수스의 보낸 전령을 통해 자기가 이겼다는 걸 알게 되었다. 텔레시누스는 부상을 입은 채 전장에 쓰러져 있다가 목이 베어졌고, 수급이 창에 꽂혀 전시되었다.
프라이네스테 주민들은 콜리나 성문 전투 결과를 통보받자 저항을 포기하고 성문을 열었다. 젊은 마리우스는 지하 땅굴을 통해 탈출을 시도했지만 입구마다 보초병들이 지키고 있는 것을 보자 자살했다. 술라는 프라이네스테에 입성한 뒤 주민을 로마인, 삼니움인, 프라이네스테인 세 부류로 나누도록 했다. 그는 로마인 주민들은 죽어 마땅하지만 자비를 베풀어 사면해주겠다고 했다. 반면 삼니움인과 프라이네스테인은 모조리 학살당했고, 도시는 철저히 약탈당했다. 젊은 마리우스의 수급은 로마로 이송되어 포룸에 내걸렸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술라는 마리우스의 수급을 확인한 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의 한 대목을 인용하며 어린 마리우스를 조롱했다고 한다.
"먼저 노 젓는 사람이 된 후에 배를 조종해야 하는 법이다."
마리우스는 아내 리키니아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보지 못했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기원전 45년, 자신을 마리우스의 아들 가이우스 마리우스라고 주장하는 인물이 로마에서 출현했다. 그는 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히스파니아에 가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형제와 맞붙고 있는 틈을 타 평민들에게 막대한 자금을 기부해서 지지를 얻어냈다. 그러나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그가 가짜라고 단정하고 로마에서 추방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진 후, '가짜 마리우스'는 로마로 돌아와서 민중의 지도자가 되려 시도했다. 그는 카이사르의 시신이 불태워진 장소에 카이사르를 위한 제단을 세우고 평민들을 선동하여 카이사르 암살자들을 처단하려 했다. 그러나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 의해 전격 체포되어 4월 13일에 별다른 재판도 받지 못한 채 처형되었다. 그의 유해는 도시 곳곳으로 끌려가다가 테베레 강에 던져졌다. 추종자들은 포로 로마노에 모여 그가 세운 제단을 마리우스에게 바치라고 요구했지만, 안토니우스는 군대를 파견해 폭도들을 해산시키고 주모자들을 처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