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라틴어: Decimus Iunius Brut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조부)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칼라이쿠스(아버지) 유니아(누이) 셈프로니아(아내)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77년 |
전임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카피톨리누스 |
동기 |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 |
후임 |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후손을 자처한 노빌레스 가문인 유니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조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기원전 178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아버지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칼라이쿠스는 기원전 138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삼촌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기원전 140년 법무관을 역임했고,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을 주동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조상이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그의 누이 유니아는 기원전 80년 법무관인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아내였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소 옥타비아의 첫번째 남편이었던 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외삼촌이다.기원전 100년 12월 원로원에 의해 국가의 적으로 규정된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토벌하고자 포로 로마노에 집결한 귀족 집단에 가담했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이후 몇년 간 여러 재판에서 변호사로 활약했다고 한다. 기원전 94년에서 90년 사이에 법무관을 맡았고, 술라의 내전이 벌어졌을 때 술라의 편에 섰다.
기원전 77년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와 함께 집정관으로 선임된 그는 히스파니아 전역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를 토벌할 임무를 맡은 군대를 이끌라는 제안을 거부했고, 영향력 있는 원로원 의원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는 당시 별다른 공직을 맡지 않았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게 세르토리우스를 토벌할 임무를 맡기자고 제안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한 의원이 "폼페이우스가 집정관을 대신해서 임페리움을 받는 게 정말로 합당하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묻자, 필리푸스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아니오. 두 집정관을 대신해야 하오."
그 후 브루투스의 행적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다만 기원전 63년 아내 셈프로니아가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의 음모에 참여해 남편이 없을 때 갈리아의 알로브로게스 부족 사절단에게 집을 제공하고 카틸리나 공모자들과 접촉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그는 이때까지 살아있던 것은 분명하다. 브루투스는 카틸리나 음모가 실패로 돌아간지 얼마 안 가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모종의 첫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은 파트리키 집안인 포스투미우스 씨족에 입양되어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로 개명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그의 첫 아내가 기원전 51년 집정관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의 아내 포스투미아의 자매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이후 카틸리나 음모에 가담했다고 전해지는 두 번째 아내 셈프로니아와 결혼했다.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에 따르면, 그는 셈프로니아와의 사이에서 2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의 신상명세는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