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라틴어: Lucius Marcius Philipp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조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아버지) 아티아(계모) 마르키아(누이) 소 아티아(아내) 마르키아(딸)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38년 |
전임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 |
동기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켈리오 |
후임 |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루키우스 카니니우스 갈루스 |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처음으로 독재관과 감찰관을 역임한 노빌레스 씨족인 마르키우스 가문의 일원이다. 조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는 법률에 해박하여 훌륭한 법률가, 변호사로 유명했으며, 기원전 91년 집정관을 맡아 로마 시민권을 이탈리아인들에게 분배하는 법안을 추진한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와 심각한 갈등을 벌일 만큼 강경한 옵티마테스파였다. 그러면서도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에서 마리우스파와 술라파 양자 사이에서 승자의 편에 서서 생존할 만큼 시세의 흐름을 보는 능력이 뛰어났다.아버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는 기원전 56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아버지 필리푸스는 성명 미상의 여인과 결혼해 그와 딸 마르키아를 낳았고, 아내와 사별한 후 아우구스투스와 소 옥타비아의 어머니인 아티아와 재혼했다. 그는 계모 아티아의 여동생인 소 아티아와 결혼해 딸 마르키아를 낳았다.
기원전 56년 화폐 주조관을 맡아 마르키우스 가문을 기리는 목적으로 기원전 144년 집정관 퀸투스 마르키우스 렉스의 두상을 앞면에 새기고 로마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건설한 수로인 아퀴아 마르키아의 모습을 뒷면에 새긴 데나리우스를 발행했다.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한 기원전 49년 호민관을 맡고 있던 그는 원로원이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를 마우레타니아 왕국으로 보내 그 곳의 공동 왕 보구드, 보쿠스 2세를 폼페이우스 편으로 회유하려 하는 것에 거부권을 행사해 저지했다.
기원전 44년 법무관에 선임되었으며,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이후 권력을 잡은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속주를 재편성하는 것에 반대해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칭찬을 받았다. 이후 옥타비아누스에게 지지를 표한 그는 기원전 38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켈리오와 함께 보결 집정관을 역임한 뒤 기원전 34/33년에 히스파니아 총독을 맡았고, 로마로 귀환한 뒤 개선식을 거행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그는 헤라클레스 무사룸(Herculis Musarum) 신전을 재건했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딸 마르키아는 기원전 11년 집정관 파울루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결혼해 아들 파울루스 파비우스 페르시쿠스와 딸 파비아를 낳았다. 파울루스 파비우스 페르시쿠스는 34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파비아는 14년 집정관 섹스투스 아풀레이우스와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