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라틴어: Lucius Cornelius Cinna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아버지 또는 조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아버지 또는 형제) 폼페이아 마그나(아내 또는 계모/제수)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마그누스(아들 또는 이복 형제)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32년 |
전임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가이우스 소시우스 |
동기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
후임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기원전 87~85년 집정관이며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함께 술라에 대적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의 후손이다. 빌헬름 카를 아우구스트 드러만(Wilhelm Karl August Drumann, 1786 ~ 1861)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직후 암살자들을 옹호하고 카이사르를 비난했다가 민중의 분노를 사서 살해당할 뻔한 기원전 44년 법무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는 기원전 32년 집정관 킨나의 형제라고 주장했다. 반면 프리드리히 뮌처(Friedrich Münzer, 1868 ~ 1942)는 기원전 44년 법무관 킨나는 그의 아버지라고 주장했다. 드러만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마리우스와 협력한 킨나는 그의 아버지일 것이고, 뮌처의 주장대로라면 조부일 것이다.기원전 44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휘하 재무관을 맡은 그는 돌라벨라의 지시에 따라 기병대를 이끌고 시리아로 향했지만, 도중에 테살리아에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에게 귀순했다. 하지만 필리피 전투 후에는 옥타비아누스에게 귀순했다. 기원전 32년 두 집정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가이우스 소시우스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가세하기 위해 발칸 반도로 떠난 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와 함께 보결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라틴어 비문 모음(Corpus Inscriptionum Latinarim)>에 따르면, 그는 나중에 프라트레스 아르발레스(Fratres Arvales, 밭의 형제들) 사제단의 일원이었다고 한다. 이외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딸 폼페이아 마그나가 결혼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가 기원전 44년 법무관 킨나와 기원전 32년 집정관 킨나 중 어느 쪽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만약 전자라면 폼페이아는 그의 계모 또는 제수일 것이고, 후자라면 아내일 것이다. 아무튼 폼페이아는 킨나와의 사이에서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마그누스를 낳았다. 이 인물은 기원전 16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손녀인 아이밀리아 레피다와 함께 아우구스투스를 음해하려 했다는 고발을 받았지만 아우구스투스에게 사면되었다. 이후 서기 5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