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 라틴어: Quintus Caecilius Metellus Celer | |
출생 | 기원전 103년 |
로마 공화국 로마 | |
사망 | 기원전 59년 |
로마 공화국 로마 |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디아데마투스(조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아버지) 켈리아(어머니)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형제) 클라우디아 테르티아(아내) 카이킬리아 메텔라(딸)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60년 |
전임 | 마르쿠스 푸피우스 피소 프루기 칼푸르니아누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니게르 |
동기 |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 |
후임 |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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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기원전 3세기부터 고대 로마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대를 이어 집정관을 역임한 노빌레스 가문인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부는 기원전 117년 집정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디아데마투스이고, 아버지는 기원전 90년 호민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다. 어머니 켈리아는 남편과 사별한 뒤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와 결혼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세번째 아내가 될 무키아 테르티아를 낳았다. 형제로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의 양자가 된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가 있었다.학자들은 그의 집정관 재임 시기와 고위 행정관의 특정 연령 기준을 설정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법에 의거해 그의 출생년도를 기원전 103년으로 정했다. 그는 기원전 80년 형제 네포스와 함께 시칠리아 총독으로서 속주민들을 착취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를 고발했다. 많은 학자들은 두 형제가 레피두스를 견제하려 한 술라의 지원을 받았으리라 추정한다. 폼페이우스는 이에 대응해 피고인의 편을 들자 민심은 레피두스 편으로 쏠렸고, 두 형제는 이부 누이인 무키아 테르티아의 남편과 대립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고발을 취소했다.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에 따르면, 그는 일련의 군사 원정에 참여했다고 한다. 학자들은 그가 대대장을 맡아 여러 전장에서 활동했을 거라 추정한다. 기원전 66년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임페리움을 맡은 폼페이우스의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을 맡았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그는 아르메니아와의 국경 지대에서 분견대를 이끌다가 캅카스 알바니아인들의 공격을 받았지만 즉시 반격해 승리했다고 한다.
기원전 63년 법무관에 선임되어 로마 시민권자들을 대상으로 열린 법정을 이끄는 도시 법무관(praetor urbanus)을 맡았다. 그는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살해해 로마 시민을 무고하게 죽인 혐의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친구 티투스 라비에누스에게 기소된 전직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라비리우스 재판을 주관했다. 여론이 라비리우스의 사형을 요구하자, 그는 민회를 소집한 뒤 당시 상황상 그가 그들을 죽인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다고 설명해 여론을 가라앉히려 했다. 그러나 민회에서도 사형을 당장 집행하려는 분위기가 일자, 불길한 징조가 나타났다는 핑계를 대며 재판을 해산했다. 이후 재판은 두 번 다시 재개되지 않았고, 라비리우스는 목숨을 건졌다.
같은 해 카틸리나 음모가 로마에서 불거졌다. 카틸리나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그의 집에 자진해서 연금되겠다고 밝혔지만, 그는 이를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나중에 카틸리나 추종자들이 이탈리아 각지에서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현직 집정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그를 피케눔과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로 보내 군대를 모집하여 상황을 안정시키게 했다. 그는 그곳에서 많은 인사를 분란 혐의로 체포해 감옥에 가뒀다고 전해진다. 카틸리나가 에트루리아로 피신해 가이우스 만리우스의 군대와 합세한 뒤 갈리아로 북상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3개의 군단을 일으켜 이를 저지했다. 이에 카틸리나는 자신들을 추격하는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의 토벌대와 정면 대결하기로 했지만 피스토리아 전투에서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 후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으로서 몇년간 활동한 그는 기원전 60년 동방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폼페이우스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폼페이우스의 부관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폼페이우스는 두 집정관의 권력을 활용해 참전 용사들에게 토지를 제공하고 동방을 재편성한 조치를 승인받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곧 폼페이우스와 결별하고 폼페이우스를 적대하는 원로원 의원들과 손잡았다. 그는 참전용사들에게 토지를 할당할 것을 제안한 아프라니우스의 농지법을 거부했으며, 폼페이우스가 동방에서 시행한 정책을 추인하는 것 역시 반대했다. 그가 이렇게 나온 이유는 불분명하나, 폼페이우스가 무키아 테르티아와 이혼한 것에 대해 악감정이 있었고, 폼페이우스에게 종속되느니 그를 적대시하는 세력과 손잡고 독자적인 길을 걷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폼페이우스는 이런 상황을 좀처럼 타개하지 못하다가 나중에 카이사르의 설득을 받아들여 카이사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제1차 삼두정치를 결성했다.
한편, 그는 세금 징수관들에게 부과된 징수액을 감면해달라는 요청 역시 거부했으며,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가 호민관이 되기 위해 파트리키 신분을 버리고 평민의 양자가 되려는 것 역시 거부했다. 이듬해인 기원전 59년 집정관에 오른 카이사르가 농지법을 발의하자 반대했지만,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지원에 힘입어 통과시키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 후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으로 부임할 준비를 했으나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에 대해 그의 아내 클라우디아 테르티아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그는 기원전 79년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딸 클라우디아 테르티아와 결혼했다. 그러나 클라우디아는 수많은 남성과 간통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저명한 시인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카툴루스였다. 카툴루스는 한 시에서 그를 "바보"이자 "나귀"라고 비하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딸 카이킬리아 메텔라를 두었는데, 기원전 44년 재무관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의 아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