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볼카티우스 툴루스 라틴어: Lucius Volcatius Tull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볼카티우스 툴루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66년 |
전임 |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
동기 | 마니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
후임 |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루키우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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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행정관을 단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평민 가문인 볼카티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그의 노멘 볼카티우스(Volcatius)는 때때로 볼카키우스(Volcacius)로 쓰였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경력 초기에 보조 조영관 선거에 낙선했지만 나중에 당선되었다고 한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집정과 고위 행정관 간의 취임 간격을 설정한 법에 의거한다면, 그는 기원전 69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을 것이다.기원전 66년 마니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그가 기원전 66년 1월 1일 레피두스와 함께 원로원 회의를 주재했을 때, 호민관 가이우스 마닐리우스가 해방노예를 위한 새로운 투표 절차에 관한 법안을 제출했다. 이에 따르면, 이제까지는 해방노예가 이전의 주인과 함께 한 자리에서 투표해야 했다면, 이제는 자유롭게 투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법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원전 66년 집정관 임기 마지막 날, 카틸리나가 포로 로마노에서 무장했다는 보고가 원로원에 보고되었지만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재판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훗날 카틸리나가 그날 집정관을 살해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카틸리나가 이듬해 집정관으로 선임된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와 루키우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를 죽이려 했다는 주장이라고 보지만, 일부 학자들은 현직 집정관 레피두스와 툴루스의 암살을 계획했다는 이야기라고 본다. 하지만 키케로의 이 주장은 카틸리나가 오래 전부터 무장 봉기를 꾀했다고 몰아가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다.
기원전 63년 12월 5일 키케로가 로마에서 체포된 카틸리나 추종자들을 재판없이 처형하겠다고 밝혔을 때 지지를 표명한 전직 집정관 중 한 명이었으며, 기원전 57년 12월 과 기원전 56년 2월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이집트 파라오로 복귀시키는 방안을 논의한 원로원 회의에 참석했다. 기원전 54년에는 기원전 53년도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다가 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당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를 변호했지만 그가 유죄 판결을 받고 추방당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기원전 49년 초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했다. 1월 14일 또는 15일 원로원 회의에서 협상을 시작하자고 제안했지만, 폼페이우스 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시골에서 숨죽이고 지내다가 4월 1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초청을 받아들여 원로원에 재출석했다. 기원전 46년 9월 또는 10월, 원로원 의원들이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망명지에서 로마로 돌아와달라고 요청한 회의에 참석했지만, 다들 마르켈루스의 복귀를 승인한 독재관 카이사르에게 감사를 표할 때 유일하게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루키우스 볼카티우스 툴루스는 기원전 33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카이사르 휘하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였던 가이우스 볼카티우스 툴루스도 그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으나, 많은 학자들은 아들이 아니라 조카라고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