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마르키우스 루푸스 라틴어: Quintus Marcius Crisp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퀸투스 마르키우스 루푸스(아버지)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36년 |
전임 | 루키우스 겔리우스 포플리콜라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
동기 |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
후임 | 루키우스 코르니피키우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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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노빌레스 가문인 마르키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일부 학자들은 제3차 노예 전쟁 때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루카니아에 주둔한 칸니쿠스와 카스투스의 노예군을 물리치기 위해 파견한 12개 코호트를 통솔해 반란군을 궤멸시킨 퀸투스 마르키우스 루푸스가 그의 아버지라고 추정한다.기원전 58년 이전에 조영관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57년부터 55년까지 마케도니아 총독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의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을 역임했다. 카이사르의 내전이 벌어지기 직전에 법무관을 맡은 그는 내전이 발발하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편에 섰다. 기원전 47~46년에 레가투스로서 카이사르의 아프리카 원정에 참여했다.
탑수스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카이사르는 그에게 3개의 코호트를 맡기고 타베나 시를 공략하게 했다. 그는 임무를 완수한 뒤 기원전 45년 비티니아와 폰토스 일대의 총독이 되었다. 기원전 44년 초 카이사르의 사촌이자 시리아 총독이었던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킨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바수스에게 고전하던 루키우스 스타티우스 무르쿠스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고 3개 군단을 이끌고 그에게 가세한 뒤 카이킬리우스가 숨은 아파메이아를 포위 공격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진 후 원로원으로부터 아시아 총독으로 임명된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시리아에 도착했다. 그는 카시우스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카이사르를 죽인 그의 밑에서 일하기를 거부했다. 이후 로마로 복귀한 그는 현대의 많은 학자들로부터 파스티 카피톨리니에서 기원전 36년 7월 1일에 사임한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를 대신해 보결 집정관에 선임된 "마르키우스"의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있지만 기록이 부족해서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