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소시우스 라틴어: Gaius Sosi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소시아(딸) 소시아 갈라(딸) |
참전 |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32년 |
전임 | 루키우스 비니키우스 퀸투스 라로니우스 |
동기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
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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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과 로마 제국의 군인, 정치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편에 서서 옥타비아누스에 대적했지만 악티움 해전 후 사로잡혔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사면받은 뒤 정계를 은퇴했다.2. 생애
파트리키 출신으로 전해지지만, 부모와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기원전 66년 마니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동료 재무관으로 '가이우스 소시우스'가 있었으며, 기원전 49년 법무관을 역임하면서 옵티마테스 파의 편에 서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탄핵했다가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 폼페이우스와 소 카토가 그리스로 떠났을 때 함께 가지 않고 카이사르에게 복종한 '가이우스 소시우스'라는 인물도 있지만, 현대 역사학자들은 두 인물 모두 이 문서의 주인공과 같은 인물이 아니라고 간주한다.그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40년 또는 기원전 3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화폐확적 자료에 따르면, 그는 이 당시 재무관을 역임하면서 자킨토스에서 해방자 내전으로 피폐해진 그리스의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대량의 동전을 주조했다. 또한 그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측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와 브룬디시움에서 평화 협약을 맺었을 때,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그를 몇년 안에 집정관으로 세우는 조건을 관철시켰기 때문이다.
기원전 38년, 안토니우스는 소시우스를 시리아 총독으로 임명하고 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공 때 로마로 피신한 헤로데 대왕을 유대 왕국의 국왕으로 옹립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기원전 37년 여름 헤로데에게 2개 군단을 제공했다. 헤로데는 즉시 예루살렘으로 쳐들어가 3개월 내지 5개월간 공성전을 벌인 끝에 왕위 경쟁자 안티고노스 2세 마타티아스를 체포하여 처단한 뒤 유대의 왕이 되었다. 로마 병사들은 그를 임페라토르로 칭송했고, 그는 이를 기념하여 특별 주화를 주조했다. 기원전 34년 9월 3일 로마에서 유대의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식을 거행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기원전 343년 즈음에 시리아 총독에서 물러났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32년 1월 1일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함께 사전에 정해진 대로 집정관을 맡았다. 그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안토니우스의 최근 조치, 특히 동방 영토를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의 자식들에게 분할하는 계획을 승인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알렉산드리아 영토분할령을 대중에 공개하고 이를 성토하라는 옥타비아누스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유언서를 공개해, 그의 정치적 명분에 치명타를 가했다. 플루타르코스와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문제의 유언서는 화로의 여신을 지키던 사제 처녀들에게 보관되어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안토니우스 진영에 속해 있다가 옥타비아누스파로 변절한 마르쿠스 티티우스와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가 유언서가 숨겨진 장소를 밀고해서 옥타비아누스가 알게 되었다고 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신성모독죄를 무릅쓰고 이를 탈취해 선동의 도구로 이용했다. "내가 죽으면 로마가 아닌 알렉산드리아에 묻어달라"는 안토니우스의 유서가 진짜인지 위조된 것인지 여부는 오래도록 논란이 이어졌다. 로마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 중 한 사람인 로널드 사임 교수는 이 유언서가 진본이 아니라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날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존 로버트 존슨 등은 유언서가 진본이라고 주장했으며, 현재 역사학계는 유언서가 진본일 가능성이 크다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1]
유언장이 진짜이든 가짜이든 상관없이, 이것은 안토니우스를 회복 불가능한 궁지로 내몰았다. 이 유언서는 옥타비아누스 진영이 그간 소문으로만 퍼뜨렸던 온갖 주장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의 구실을 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광범위한 정치조직을 동원하여 안토니우스가 원로원의 동의 없이 로마의 속국들을 불법적으로 분할했다는 주장, 정실부인인 소 옥타비아를 내쫓고 클레오파트라를 정식 아내로 맞이했다는 주장, 카이사르의 적장자로 카이사리온을 지명했다는 주장, 안토니우스가 죽으면 알렉산드리아에서 클레오파트라 곁에 묻히고 싶어한다는 주장 등을 유포시켰다.
집정관 소시우스는 이에 맞서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에 없을 때 원로원 회의를 소집한 뒤 옥타비아누스의 언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단행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귀환한 뒤 병사들에게 원로원 회의장을 포위하게 한 후 안토니우스를 강력히 규탄하는 한편 두 집정관과 친 안토니우스파 인사들에게 로마를 떠나라고 위협했다. 이에 아헤노바르부스, 소시우스, 그리고 300명의 원로원 의원이 기원전 32년 3월 로마를 떠나 안토니우스가 군대를 규합하고 있던 아테네로 달려갔다.
아헤노바르부스와 소시우스는 로마의 상황을 안토니우스에게 전하면서, 로마 시민들이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매우 적대적이니 이집트로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이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권력투쟁을 로마와 이집트 여왕의 전쟁으로 왜곡시킨 옥타비아누스의 정치 공세에 대한 대응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처음에는 두 집정관의 주장에 설득되어 클레오파트라에게 이집트로 돌아가 있으라고 권했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저들이 내게 전쟁을 선포한 이상 끝까지 당신과 함께 싸우겠다"라고 밝혔고, 안토니우스의 부관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 역시 클레오파트라가 계속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안토니우스는 마음을 바꿔 클레오파트라가 계속 있게 했다.
그 후 안토니우스의 해군 지휘관 중 한 사람이 되어 악티움 항구 앞바다에서 적 함대와 대치하던 그는 기원전 31년 8월 31일 새벽에 선봉 함대를 이끌고 안개가 짙게 깔린 틈을 타 루키우스 타리우스 루푸스가 이끄는 적 함대를 습격해 패주시켰지만, 아그리파가 이끄는 적 함대가 재빨리 증원하는 바람에 돌파에 실패하고 킬리키아 왕 타콘디모토스가 전사하는 등 손실을 입고 패주했다. 9월 2일 악티움 해전이 본격적으로 벌어졌을 때 남쪽 편대를 이끌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가 이집트로 달아나면서 전투에서 패한 그는 곧 사로잡혔고, 옥타비아누스는 사형 선고를 내렸다. 이때 루키우스 아룬티우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지금은 비록 적이지만 우리와 같은 동족이며 명망높은 귀족이니 관용을 베풀어주십시오"라며 호소하자,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받아들여 소시우스를 사면했다. 그리하여 목숨을 건진 그는 로마로 돌아간 후 정계에서 은퇴하고 아폴로 신전을 재건하고 이 성소에 아폴로 조각상과 셀레우키아에서 가져온 니오비데스 조각상을 세웠다. 그는 기원전 17년 루디 새큘라레스(Ludi saeculares: 제사와 연극 공연을 포함한 고대 로마의 종교 축제)를 주관한 것을 끝으로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그가 아들을 낳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두 딸 소시아와 소시아 갈라는 알려져 있다. 소시아는 서기 8년 집정관을 역임한 섹스투스 노니우스 퀸틸리아누스의 아내가 되었고, 소시아 갈라는 서기 13년 집정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실리우스의 아내가 되었다.
[1] 무엇보다도 안토니우스 본인이 유언장의 내용을 부인하지 않은 것부터가 진본이라는 가장 유력한 증거라고 할 수 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