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라틴어: Marcus Aemilius Lepid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77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사르데냐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조부)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아버지) 아풀레이아(아내)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장남)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차남)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아이밀리아누스(삼남)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78년 |
전임 |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
동기 |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카피톨리누스 |
후임 |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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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술라의 내전에 참여하여 마리우스파 숙청에 일조했지만 술라가 사망한 뒤 에트루리아 반란군과 합세해 로마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가 실패한 뒤 사르데냐로 도망쳤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제2차 삼두정치의 일원이었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아버지다.2. 생애
아이밀리우스 씨족은 고대 로마의 가장 오래된 파트리키로 손꼽히는 18개의 씨족 중 하나다. 이들의 시조는 누마 폼필리우스라고 하며, 플루타르코스가 인용한 전승에는 아이네이아스와 라비니아의 딸 에밀리아가 이들의 시조라고 한다. 플루타르코스는 이들이 "지칠 줄 모르고 높은 도덕적 자질을 갖췄다"고 평했다. 이 씨족의 지파인 레피두스 집안은 기원전 285년 집정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를 배출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 고위 행정관을 배출했다.기원전 5세기부터 아우구스투스 통치 시기까지 이어지는 로마 공화국의 최고 행정관 목록을 담은 파스티 카피톨리니(Fasti Capitolini)에 따르면, 그의 할아버지는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이고 아버지는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라고 한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그의 아들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증조부가 기원전 187년과 기원전 175년 집정관을 역임하고 여섯 번 연속 프린켑스 세나투스를 맡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라고 밝혔다. 학자들은 이 점을 토대로, 그의 아버지 퀸투스는 기원전 187년, 175년 집정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막내라고 추정한다. 반면 독일의 고전 역사가 빌헬름 드러만(Wilhelm Drumann, 1786 ~ 1861)은 그의 할아버지가 마그네시아 전투에 참전한 대대장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기원전 103년과 100년 호민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의 딸 아풀레이아와 결혼했지만, 기원전 100년 12월 사투르니누스가 집정관 당선인 가이우스 멤미우스를 살해하는 바람에 원로원으로부터 원로원 최종결의를 선고받고 정치적 동맹자였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버림받았을 때 그를 돕지 않았다. 이후 동맹시 전쟁 동안 아스쿨룸을 포위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가 지휘하는 군대의 대대장으로 활동했다. 기원전 88년부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내전이 벌어졌을 때, 그는 시세를 살피다가 술라의 편에 섰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기원전 82년 이탈리아에서 술라에 대한 마지막 저항을 이끌던 노바 시를 공략했고, 노바 주민들은 집단 자살하고 도시는 화염으로 불살라졌다고 한다.
레피두스는 술라에게 숙청당한 인사들의 재산을 거의 공짜로 사서 로마에서 제일가는 부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는 이에 대해 그가 술라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일부러 이런 식으로 행동했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80년에는 시칠리아 총독으로 언급되었는데, 이로 볼 때 기원전 81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시칠리아 총독으로서 재산을 더욱 늘렸고, 로마에 돌아온 뒤 아이밀리아 바실리카를 복원하고 호화로운 별장을 지었다. 그는 건축에 누미디아 대리석을 사용한 최초의 로마인이었다.
그는 곧 시칠리아에서 속주민들을 상대로 착취를 자행한 혐의로 고발당했다. 고발자는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루스 형제였다. 이들은 술라의 최측근이었기에, 많은 학자들은 술라가 이 고발의 배후에 있다고 본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술라는 그를 "최악의 인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술라가 그를 갑작스럽게 적대시한 까닭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레피두스가 내심 정권을 뒤엎으려는 계획을 품었다는 것을 눈치챘을 수도 있다. 이때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레피두스 편을 들었다. 레피두스가 아버지 휘하에서 복무한 적이 있었고, 술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레피두스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계획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폼페이우스가 레피두스의 편을 서자, 두 메텔루스들은 고발을 취소했다.
이후 레피두스는 기원전 78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다. 당시 민간인이었던 술라는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카피톨리누스와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를 지원해 그의 당선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레피두스는 평민과 폼페이우스측 병사들의 강력한 지원 덕분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카피톨리누스가 가까스로 차석 집정관이 되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술라는 집정관 선거 직후 폼페이우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네가 이번 성공에 만족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악명 높은 악당 레피두스가 민중 앞에서 너의 도움 덕분에 집정관으로 선출되고, 가장 존경받는 사람들 중 한 명인 카툴루스보다 훨씬 더 성공적으로 부각된 너는 얼마나 고귀하고 훌륭하겠느냐? 이제 잠을 자지 않고 경계해야 할 때가 왔다. 결국 너는 자신보다 훨씬 강한 적을 얻었으니까."
레피두스와 카툴루스는 곧 심각한 갈등을 벌였다. 기원전 78년 초 술라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카툴루스는 술라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레피두스는 술라는 그럴 자격이 없으며 아예 장례식을 치를 명예조차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소식을 접한 술라의 퇴역병들이 로마에서 몰려와 항의하자, 레피두스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고 장례식은 카툴루스의 주장에 따라 국장으로 치러졌다. 이후 레피두스는 빈민들에 대한 무료 빵 분배량 증진, 술라에게 숙청된 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에 대한 사면, 술라가 퇴역병들을 위해 빼앗아간 토지들을 이탈리아인들에게 반환하는 등 일련의 법안을 제시했다. 카툴루스 등이 이에 강력하게 반대해 무산되자, 그는 정권을 뒤엎어서라도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겠다는 마음을 품었다.
얼마 후, 술라의 퇴역병들에게 토지를 빼앗겼던 에트루리아인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피에솔리 시로 몰려가서 술라의 퇴역병들을 모조리 죽이거나 쫓아냈다. 이 소식을 접한 원로원은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두 집정관을 보내면서 서로에게 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했다. 레피두스는 에트루리아에 도착한 뒤 반란군과의 교전을 기피하고 그들의 뜻에 공감하는 언행을 공공연히 했다. 이에 카툴루스는 레피두스가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때까지 군대를 소모시키지 않기 위해 군대를 후방으로 물렸다. 이윽고 기원전 78년 연말이 다가오자, 원로원은 레피두스에게 로마로 돌아와서 집정관 선거를 주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레피두스는 가기를 거부했고, 카툴루스만 돌아왔다.
기원전 77년, 레피두스는 전직 집정관의 권환으로 에트루리아에 남았다가 기어이 로마를 상대로 반기를 일으켰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1], 마르쿠스 페르페르나 베이엔토,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아이밀리아누스 등이 이 반란에 가담했다. 여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반란 가담을 제안받았으나 거부했다. 레피두스가 에트루리아인과 합세해 반란을 일으키자, 카툴루스는 원로원에 당장 레피두스를 국가의 적으로 단죄하고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91년 집정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도 그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찬성했지만, 원로원은 레피두스를 당해내지 못할 것을 걱정해 레피두스가 반란을 중단한다면 사면하겠다고 제안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레피두스는 개혁을 요구하며 거부하고 로마를 향해 진격했다. 이에 원로원은 원로원 최종결의를 반포하고 레피두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한 뒤 카툴루스에게 반란 토벌을 맡겼다. 하지만 실질적인 지휘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맡았다. 로마 인근의 캄푸스 마르티우스에서 벌어진 격전 끝에 레피두스는 패배하고 에트루리아로 후퇴했다. 이후 폼페이우스는 브루투스의 군대를 공격해 무티나에서 포위했다. 브루투스는 폼페이우스로부터 신변 보장을 약속받고 항복했으나 도리어 폼페이우스에게 처형되었다. 한편 페르페르나도 리구리아에서 로마군에게 패배한 뒤 레피두스과 합세했고, 레피두스의 아들인 루키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아이밀리아누스는 라티움의 알바 시에서 포위된 뒤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항복했으나 곧 살해당했다.
레피두스는 전열을 재정비한 후 다시 로마로 진군했으나 또다시 패배하고 에트루리아의 코자 시로 퇴각했다. 카툴루스는 코자 시민들에게 사면을 약속했고, 시민들은 이에 호응해 레피두스를 몰아냈다. 결국 레피두스는 사르데냐로 도주했다. 이곳은 로마의 곡물 공급원 중 하나였기 때문에, 이곳을장악한다면 재기를 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르데냐 총독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티아리우스와의 전투에서 패배해 부상을 입은 뒤 사르데냐에서 상륙한 지 2~4주 만에 사망했다. 아피아노스는 그의 부상이 악화되어 죽었다고 밝혔고, 플로루스는 "질병과 후회" 때문에 죽었다고 기술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당시 로마에 있던 아내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소문을 듣고 슬픔을 못이겨 사망했다고 한다. 그 후 레피두스의 군대는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이중 가장 큰 분견대는 마르쿠스 페르페르나의 지휘하에 히스파니아로 건너가 로마 정부에 반기를 든 마리우스파 인사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와 합세했다.
그는 아풀레이아와의 사이에서 세 아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아이밀리아누스를 낳았다. 이중 세번째 아들은 기원전 83년 집정관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에게 입양되었고, 기원전 77년 아버지의 반란에 가담했다가 죽었다. 다른 두 아들의 행적은 각각의 항목 참고.
[1]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자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