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라틴어: Lucius Aurelius Cotta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아버지) 루틸리아(어머니)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형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형제) 아우렐리아 코타(사촌)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65년 |
전임 | 마니우스 아우렐리우스 레피두스 루키우스 볼카티우스 툴루스 |
동기 | 루키우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
후임 |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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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2. 생애
기원전 2세기 말부터 로마 정계에서 활약한 노빌레스 가문인 아우렐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는 파스티 카피톨리니에서 그의 아버지로 언급되었지만 그 외에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어머니 루틸리아는 기원전 105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의 누이였다. 형제로 기원전 75년 집정관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기원전 74년 집정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가 있었다. 또한 사촌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 코타가 있었다.그는 젊은 시절 화폐 주조관으로 일했다고 전해지지만 이를 맡은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82년 독재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숙청 명단에 넣자, '아우렐리우스 코타'와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 등이 카이사르를 용서해달라고 요청했다. 수에토니우스는 아우렐리우스 코타라는 이름의 프라이노멘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가이우스일 가능성이 있다. 술라는 투덜거리며 카이사르를 사면하겠다고 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고 한다.
"당신들 좋을 대로 그 친구를 데려가시오. 다만 당신들이 그리도 살리고 싶어하는 사람이 언젠가는 당신들이 나와 함께 지켜온 귀족층의 대의에 치명타를 날릴 거라는 점만 알아두시오. 이 카이사르라는 친구 안에는 마리우스가 여럿 들어 있으니까."
기원전 70년 법무관을 역임한 그는 당해 집정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술라의 개혁을 폐기하는 사업에 동참했다. 그는 원로원 의원만으로 배심원을 구성하도록 한 술라의 조치를 폐기하고 에퀴테스가 1/3, 원로원 의원이 1/3, 에퀴테스에 속하지 않은 부유한 시민이 1/3을 차지하게 했다.
기원전 66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한 그는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푸블리우스 아우트로니우스 파이투스에게 패배했다. 하지만 자신과 함께 낙선한 루키우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와 함께 아우트로니우스와 술라가 유권자들을 매수했다고 고발했다. 법원은 고발이 정당하다고 판단하고 아우트로니우스와 술라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고, 두 사람의 당선은 무효 처리되었다. 이후 열린 재선거에서 그와 토르콰투스가 당선되어 기원전 65년도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기원전 66년 집정관 임기 마지막 날, 카틸리나가 포로 로마노에서 무장했다는 보고가 원로원에 보고되었지만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재판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훗날 카틸리나가 그날 집정관을 살해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카틸리나가 이듬해 집정관으로 선임된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와 루키우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를 죽이려 했다는 주장이라고 보지만, 일부 학자들은 현직 집정관 레피두스와 툴루스의 암살을 계획했다는 이야기라고 본다. 하지만 키케로의 이 주장은 카틸리나가 오래 전부터 무장 봉기를 꾀했다고 몰아가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다. 이후 코타가 집정관으로서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기원전 64년, 지난해에 감찰관에 선임되었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카피톨리누스가 심각한 갈등을 벌인 끝에 조기 사임했다. 플루타르코스는 키케로의 전기에서 그가 감찰관이라고 언급했지만, 그의 동료 감찰관이 누구였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다른 사료에서도 기원전 64년에 감찰관으로 선임된 인물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코타의 동료 감찰관을 파악할 수 없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코타는 원로원에서 추방될 것을 두려워한 호민관의 방해공작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기원전 63년 12월 5일, 로마에서 체포된 카틸리나 공모자들을 재판없이 처형하는 것을 논하는 원로원 회의가 열렸다. 그는 즉결 처형에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나중에 신께 카틸리나의 음모가 실패하게 해준 것에 감사를 드리는 제사를 올리자고 제안해 관철시켰다. 기원전 57년 1월 1일에는 키케로가 망명하도록 강요한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법을 무효화할 것을 제안하면서, 자신이 당시 감찰관이었다면 원로원 명단에 키케로의 이름을 포함시켰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 후 키케로는 폼페이우스 등의 지원에 힘입어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기원전 49년 1월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의 지지를 받으며 지지자들에게 로마의 각 지방을 배분했지만 그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는 카이사르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배분하지 않았다. 기원전 44년 시빌라 예언서를 관리하는 데켐브리의 일원에 발탁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진 지 6개월 후인 기원전 44년 9월, 키케로는 친척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코타가 "치명적인 절망 때문에 원로원에 거의 오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