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라틴어: Gnaeus Calpurnius Piso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로마 제국 |
가족 |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아버지)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장남)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차남)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3년 |
전임 |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 |
동기 | 아우구스투스→루키우스 세스티우스 알바니아누스 퀴리날리스 |
후임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아이세르니누스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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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집정관. 확고한 옵티마테스 인사로, 카이사르의 내전 때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맞섰고 해방자 내전 때도 2차 삼두정치에 대항했다. 그럼에도 두 번 사면을 받고 평범한 원로원 의원으로 지내다가 기원전 23년에 돌연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집정관에 선임되었다.2. 생애
칼푸르니우스 씨족은 로마의 전설적인 두번째 왕 누마 폼필리우스의 아들 칼푸스를 시조로 둔 평민 귀족(노빌레스)이다. 이 가문에는 여러 분파가 속해 있었는데, 그중 가장 저명한 분파가 기원전 2세기 초부터 집정관을 역임하면서 엄청난 위세를 떨친 피소 가문이었다. 아버지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는 기원전 65년 재무관을 역임했으나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의 쿠데타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처형되었다.기원전 65년, 그는 호민관을 맡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게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이끌 임페리움(지휘권)을 주자는 안건을 민회에서 통과시켰던 가이우스 마닐리우스를 호민관 임기가 끝난 이듬해에 "로마인의 위대함에 대한 모독" 혐의로 고발했다. 폼페이우스를 지지하는 폭도들이 재판정을 한 차례 습격했지만, 그는 이를 무릅쓰고 재판을 이어갔고, 마닐리우스는 유죄 판결이 내려질 가능성이 높아지자 망명했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그는 젊음의 열정에 이끌려 마닐리우스의 강력한 후원자인 폼페이우스에 대해 심각한 혐의를 제기했다. 이에 폼페이우스가 왜 더 나아가 자신을 재판에 기소하지 않느냐고 묻자, 피소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기소당한 당신이 공화국에 내전을 일으키지 않을 거라는 보증을 주시오. 그러면 즉시 당신을 재판에 기소해 배심원들이 유죄를 판결하게 하고 마닐리우스가 아닌 당신이 망명자가 되게 하겠소."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옵티마테스에 마음을 두고 있던 그는 가까운 히스파니아 속주로 가서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와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 휘하의 히스파니아군에서 재무관으로 근무했다. 두 장군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패배한 뒤 아프리카 속주로 도망쳐서 메텔루스 스키피오 휘하에 들어가 누미디아 기병대를 지휘했다. 기원전 46년 탑수스 전투 패전 후 카이사르에게 귀순하여 용서받고 로마로 돌아갔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지자 '해방자'를 자처한 카이사르 암살자들과 뜻을 함께 했고,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군대에 합류했다. 그러나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에서 해방자파가 패망하자 귀순했고 이번에도 사면받았다. 이후 로마로 돌아가서 평범한 원로원 의원으로 지내면서 별다른 정치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기원전 23년, 그는 돌연 아우구스투스의 동료 집정관으로 발탁되었다. 당시 아우구스투스는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원로원은 그가 기원전 27년에 "모든 특권을 내려놓고 공화국을 예전의 질서로 회복시키겠다"라고 선언한 것에 기뻐했지만,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27년부터 기원전 23년까지 집정관을 매년 역임하면서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고 많은 이들이 의혹을 품었다. 여기에 아우구스투스가 누나 소 옥타비아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를 노골적으로 후원해 후계자로 세우려는 의지를 드러내자, 아우구스투스가 겉으로는 공화정을 수호하겠다고 내세우면서 실은 세습 제도를 구축해 왕정을 이루려 한다는 의혹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급기야 기원전 24/23년, 마케도니아 전임 총독 마르쿠스 프리무스가 원로원의 허락을 받지 않고 크라키아 부족민들을 상대로 전쟁을 단행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 총독 재임 중에 아우구스투스의 조카 마르켈루스의 명령에 따라 행동했다고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큰 파장이 일어났다. 아우구스투스는 몇몇 혼란스러운 속주의 통치만 정국이 안정될 때까지만 일시적으로 맡겠다고 공언했기에, 원로원의 관할로 남은 마케도니아 속주의 총독은 엄연히 원로원의 지시만 받들어야 했다. 그런데 고위 행정관을 역임한 적도 없는 어린 마르켈루스가 총독을 좌지우지했다고 하니, 원로원이 발칵 뒤집힐 만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직접 법정에서 증언하며 프리무스의 증언을 부정했지만, 공화정을 여전히 심봉하는 귀족들은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여기고 불온한 움직임을 드러냈다.(기원전 23년 로마 헌정위기)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 신봉자들을 달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과거 카이사르와 자신에게 맞서 싸우다가 사실상 은퇴해 공화정파의 존경을 받고 있던 피소를 동료 집정관으로 세우기로 했다. 피소가 왜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관둔 지 오랜 세월이 지난 이 시점에 이 역할을 받아들였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이를 거부했다가 아우구스투스에게 보복당할까 두려웠고 자식들이 정치 경력을 꽃피우려면 아우구스투스와 협력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얼마 후, 아우구스투스는 돌연 중병에 걸렸다. 상태가 갈수록 악화되어 죽음이 임박해지자,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개인적 인장은 절친한 친구이자 최측근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에게, 모든 공적 문서와 군지휘권은 동료 집정관이자 원로원파인 피소에게 맡겼다. 그러면서 아그리파와 피소에게 공동으로 로마를 이끌어달라고 부탁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을 수호하기 위해 오랫동안 싸웠던 피소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제스처를 통해 어린 마르켈루스를 후계자로 세우려 한다는 의혹을 불식시키고 원로원을 달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가 병마를 이겨내고 회복하면서 이 조치는 무효가 되었다.
그 후 아우구스투스는 집정관에서 물러났고 루키우스 세스티우스 알바니아누스 퀴리날리스가 보결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그는 집정관 임기를 끝까지 수행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는 성명 미상의 아내로부터 두 아들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를 낳았다. 장남 그나이우스는 기원전 7년 티베리우스와 함께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티베리우스의 친구이자 측근으로서 정계에서 맹활약했다. 그러나 게르마니쿠스와 심각한 갈등을 벌인 끝에 게르마니쿠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민중의 의심을 샀고, 결국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을 위기에 몰리자 자살했다. 차남 루키우스는 기원전 1년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