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카피토 라틴어: Gaius Fonteius Capitō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투스쿨룸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카피토(아버지)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카피토(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33년 |
전임 | 루키우스 아우트로니우스 파이투스 루키우스 볼카티우스 툴루스 |
동기 | 루키우스 플라비우스→마르쿠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
후임 | 루키우스 비니키우스 퀸투스 라로니우스 |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투스쿨룸 출신의 플레브스 가문인 폰테이우스 씨족 출신으로,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아버지는 그와 같은 이름이었다고 한다. 그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측근이었다. 기원전 39년 호민관을 맡았으며 사제단의 일원이기도 했다. 기원전 38년 동방의 속주들 중 하나의 총독으로 부임한 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아내 소 옥타비아의 이미지가 새겨진 동전을 주조했다. 기원전 37년 안토니우스의 대변자로서 이탈리아에 온 그는 타라키나에서 브룬디시움으로 향하는 동안 옥타비아누스와 동행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브룬디시움 협약을 맺고 화해하도록 유도했다.그 후 안토니우스에 의해 이집트에 보내진 그는 클레오파트라 7세를 안티오키아로 모셔왔다. 기원전 33년 5월 1일 루키우스 플라비우스와 함께 보결 집정관이 되었다가 퀸투스 라로니우스에게 직임을 넘겼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서기 12년 집정관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카피토는 그의 아들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