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라틴어: Gaius Cassius Longin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미상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조부)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아버지)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형제)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아들?) 퀸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73년 |
전임 |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
동기 |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쿨루스 |
후임 | 루키우스 겔리우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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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기원전 2세기부터 로마 정계에서 활동한 노빌레스 가문인 카시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루키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학자들은 기원전 107년 집정관으로 킴브리 전쟁에서 전사한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그의 아버지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형제로 기원전 89년 호민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있었다.기원전 83년 화폐 주조관을 맡았으며, 기원전 76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한 뒤 기원전 73년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쿨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두 집정관은 국가에서 빵을 구매하고 빈민들에게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하는 <테렌티우스와 카시우스의 법(Lex Terentia et Cassia)>을 반포했다. 연말에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의 총독으로 부임했으나, 곧 심각한 위협에 직면했다. 이탈리아 남부에서 시작된 제3차 노예 전쟁이 그곳까지 확대된 것이다.
기원전 72년 봄,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노예 반란군이 아이밀리아 가도를 따라 포 강 계곡에 침입했다. 그는 2개 군단을 이끌고 이들을 막았지만 패배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완전히 패배해 대다수 병력을 잃고 간신히 탈출했다고 한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는 그가 전사했다고 기술했지만, 학계에서는 신빙성이 없다고 본다. 스파르타쿠스는 갈리아 키살피나 전역을 휩쓸며 신병을 확보하고 물자를 수집한 뒤 이탈리아 남부로 이동했다.
기원전 70년, 그는 가이우스 베레스의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했다. 기원전 66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수행하게 하자는 호민관 가이우스 마닐리우스의 법안을 지지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은 그의 아들이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의 주동자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라고 주장하며, 또다른 학자들은 카이사르의 내전 때 카이사르를 지지하며 함께 싸웠던 퀸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그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기록이 미비하기 때문에 두 사람 중 누가 그의 아들인지, 아니면 둘 다 그의 아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