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라틴어: Marcus Calpurnius Bibulus | |
생몰년도 | 기원전 102년 ~ 기원전 48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그리스 이오니아 제도 코르푸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아버지) 포르키아(아내)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아들) 칼푸르니아(딸) |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59년 |
전임 |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 |
동기 | 율리우스 카이사르 |
후임 |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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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군인, 정치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집정관을 맡았으나. 카이사르의 농지법을 반대했다가 많은 굴욕을 겪었다. 이에 원한을 품고 카이사르의 내전 때 카이사르의 적수로서 맹활약했으나 도중에 사망했다.2. 생애
노빌레스 집안인 칼푸르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칼푸르니우스 씨족은 로마의 2번째 왕인 누마 폼필리우스의 신화 속 아들인 칼푸스를 조상으로 간주했다. 칼푸스는 신들과 항상 소통할 수 있을 정도로 신기가 가득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 가문의 가장 유명한 분파는 기원전 2세기 초부터 집정관을 맡은 피소 가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비불루스가 속한 분파는 그가 출현하기 이전에는 역사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아버지 역시 이름이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 없다. 그래도 일찍이 조영관에 선출되었고, 소 카토의 사위가 되었던 점을 볼 때, 나름대로 명망높은 집안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그는 기원전 69년 또는 68년에 재무관을 역임했는데,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이 시기에 재무관을 맡았다. 기원전 65년 카이사르가 조영관에 발탁되었을 무렵, 그 역시 조영관을 맡았다. 두 사람은 로마 검투 및 경마 경기를 함께 주관했는데, 수석 조영관인 카이사르가 행사를 주도한 반면 그는 보조자로서의 역할만 맡았다. 아마도 이때부터 카이사르에게 강한 라이벌 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기원전 63년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니게르, 그리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법무관을 맡았다. 이 시기에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의 로마 전복 음모가 드러났을 때, 카이사르는 우선 공모자들을 무기한 금고에 처한 뒤 재판을 거쳐 형을 집행하자고 주장했지만, 그는 즉시 사형을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이후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에서 봉기를 일으킨 카틸리나 추종자들을 진압하는 데 참여했다.
기원전 61년 카이사르가 먼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을 맡았을 때, 그는 가까운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을 맡았을 가능성이 있다. 카르타고 노바에서 발견된 고대 비문에 그의 이름이 언급되었는데, 이 시점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시기에 소 카토의 딸 포르키아와 결혼하여 옵티마테스파와의 관계를 더욱 두텁게 했다. 기원전 59년 카이사르가 이민족을 토벌한 걸 기리기 위해 개선식을 거행하고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고자 했을 때, 카토와 비불루스는 원로원을 설득해 카이사르가 개선식과 집정관 선거 중 하나만 택할 것을 강요하게 했다. 카이사르는 고민 끝에 개선식을 포기하고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기로 했다. 카이사르가 출마를 결심하자, 카토 등 옵티마테스파는 비불루스를 후보로 내세웠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밀약을 맺고 그들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은 덕분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반면 비불루스는 다른 후보들을 가까스로 제치고 차석으로 당선되었다.
집정관으로서 그의 행보는 시종일관 카이사르의 계획을 방해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동방 원정으로 확보한 자금으로 이탈리아에서 토지를 사서 퇴역병과 가난한 시민들에게 분배하는 농지법을 제안했다. 카토와 비불루스는 이에 결사적으로 반대했고, 카이사르는 원로원 통과가 난항을 겪자 민회로 문제를 넘겼다. 비불루스는 자신의 임기에는 어떤 개혁도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하며, 그를 지지한 호민관 3명과 함께 하늘의 징조가 민회를 소집하는데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폰티펙스 막시무스 직책을 역임하고 있던[1] 카이사르는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법안에 대한 표결 날짜를 정했다. 이에 그는 자신의 집에 원로원 의원들을 모아놓고 논의한 끝에 민회에서 카이사르를 반대하는 여론을 부추겨보고, 일이 안 풀리면 그가 거부권을 행사하기로 했다.
민회가 열린 날, 장인 소 카토가 장광설을 늘어놓아 시간을 끌려 했지만, 폼페이우스를 따랐던 병사들을 포함한 시민들이 그를 억지로 끌어내리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후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가 농지법 통과를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면서, 분위기는 농지법 통과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이에 비불루스가 거부권을 행사하려 하자, 카이사르가 재빠르게 "칼푸르니우스 집정관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된다"고 외쳤다. 그러자 시민들은 비불루스에게 달려들어 머리에 똥 바구니를 던지고, 호위병들을 공격했으며, 돌과 다트를 던졌다. 결국 비불루스는 거부권 행사를 하지 못한 채 자리를 떴고, 농지법은 통과되었다. 다음날, 그는 원로원에 출석해 "협박에 의한 통과는 무효"라며 농지법을 폐지하자고 주장했지만, 시민들이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킬까 두려웠고 로마 제일의 거물인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마저 카이사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니 승산이 없다고 본 의원들은 그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동료 집정관에게 저항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관저에 출근하지 않고 집에 틀어박혔다. 하지만 모든 걸 놓아버리진 않았다. 그는 주기적으로 칙령을 발표했는데, 거기에는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이사르의 사생활에 대한 온갖 비방과 모독이 들어 있었다. 특히 카이사르가 유혹한 유부녀 목록이 적나라하게 들어있었으며, 니코메데스 4세의 동성 연인이라는 의혹이 있던 카이사르를 "비티니아의 왕비"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를 무척 재미있게 봤고, 비불루스의 칙령이 발표될 때 이걸 읽으러 온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별 신경쓰지 않고 독자적으로 정책을 주관했다. 시민들은 이에 대해 기원전 59년을 "카이사르와 비불루스의 해"가 아니라 "율리우스와 카이사르의 해"라고 불렀다.
카이사르가 차기 집정관 선거를 7월 말에 하기로 정했으나, 비불루스는 시민들 사이에서 삼두정치에 대한 인기가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점을 고려해 10월 18일로 옮겼다. 폼페이우스는 공개 석상에서 선거일을 미루는 걸 반대했고, 카이사르는 군중을 비불루스의 집으로 보내 그의 결정을 취소하라고 강요했지만, "죽일 테면 죽여라."며 뻗대는 그를 어찌할 수 없었다. 호민관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는 비불루스를 체포하려 했지만, 카이사르는 그를 막고 이 문제만은 비불루스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기원전 59년 10월 초, 루키우스 베티우스가 폼페이우스를 죽이려 했다가 체포된 사건이 벌어졌다. 베티우스는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그리고 현직 집정관 비불루스가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암살을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비불루스는 베티우스에게 직접 단검을 줬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이 증언을 믿지 않았고, 베티우스는 곧 옥사했다. 이후 열린 집정관 선거는 카이사르가 직접 이끌었고, 폼페이우스의 심복인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와 카이사르의 장인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가 기원전 58년 집정관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대표적인 옵티마테스파인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가이우스 멤미우스 등이 법무관을 역임하여 이를 견제했다.
기원전 59년 연말, 이번에는 평민에게 입양되어 호민관에 당선된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가 민회의 투표는 아무 날이나 열릴 수 있으며, 그 날에 하늘의 징조를 관찰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그는 지난날 비불루스가 카이사르가 정한 표결 투표일에 대해 불길한 징조가 있으니 그만둬야 한다고 주장했던 걸 겨냥한 것이었다. 호민관의 발의는 기원전 58년 1월에 민회에서 승인되었고, 이후로는 누구도 투표일에 관해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는 기원전 59년 집정관 경력은 비불루스에게 가장 큰 불명예였다고 평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총독으로 부임하여 갈리아 전쟁을 벌인 뒤, 그는 소 카토, 아헤노바르부스와 함께 삼두정치에 대항하는 원로원 의원들의 우두머리로서 활동했다. 기원전 57년 클로디우스에 의한 키케로의 집 파괴가 불법이라는 법령을 통과시켰고, 기원전 56년 이집트의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파라오로 복귀하게 하는 방법에 관한 토론에도 참여했다. 폼페이우스는 군대를 직접 이끌고 이집트로 가려 했지만, 그는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와 함께 군대가 아닌 3명의 사절을 이집트로 보내 파라오의 복귀를 주선하자고 주장해 의견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시리아 총독이자 폼페이우스의 심복 아울루스 가비니우스가 프톨레마이오스 12세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고 본국의 허락 없이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진군해 베레니케 4세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복위시켰다. 이에 비불루스 등은 임기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온 아울루스 가비니우스를 부정부패 혐의로 고발했고, 가비니우스는 결국 강제 추방되었다.
기원전 53년, 삼두정치의 1인이었던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에 착수했다가 카르헤 전투에서 패사했다. 이후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그를 비롯한 옵티마테스파는 폼페이우스에게 접근했다. 기원전 52년 클로디우스 추종자들과 밀로 추종자들이 격렬한 시가전을 벌이면서 로마 시가 혼란에 빠지자, 그는 폼페이우스를 단독 집정관으로 추대해 혼란을 잠재우게 했다. 마침 아내이자 카이사르의 딸이었던 율리아와 사별했던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와 관계를 끊고 옵티마테스파와 손을 잡기로 하고, 대표적인 옵티마테스파인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하고 기원전 52년 9월에 스키피오를 동료 집정관으로 선임했다.
폼페이우스가 집정관을 맡고 있을 때, 적어도 5년전에 집정관을 맡았던 귀족들이 지방 총독으로 임명되는 법이 통과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기원전 51년에 시리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 일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아, 12월에야 시리아에 도착했다. 그는 군사적 영광을 얻고자 시리아와 킬리키아의 경계에 있는 아만 산에 사는 부족들을 상대로 군사 작전을 개시했지만, 수많은 병력과 대대장 섹스투스 루킬리우스 등 부관들을 잃고 패배했다. 그는 패전 이후 자기 속주를 방어할 병력을 모집하고자 두 아들을 알렉산드리아로 보내 전 시리아 총독 가비니우스가 남겨둔 로마 군인들을 불러들이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집트에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비불루스가 자기들의 상관인 가비니우스를 추방한 장본인으로 여겼기 때문에, 두 명의 젊은 칼푸르니우스를 죽여버렸다.
당시 시리아 속주와 이웃한 킬리키아 속주 총독을 맡고 있던 키케로는 기원전 50년 6월 26일 친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불루스가 슬픔과 허탈함에 시달리고 있지만, 전쟁을 치르는 모든 노고를 짊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와 동시에, 비불루스의 부관들과 친구들은 키케로에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했고, 키케로 본인도 도와줄 의사가 있었지만, 정작 비불루스는 "절대 도움을 요청하지 않겠다"라며 거부했다고 한다. 키케로는 이를 비합리적인 적대감의 표현이라고 여겼다. 또한 그는 파르티아군에게 습격당해서 혼란해진 시리아 상황을 아시아 총독 퀸투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에게 알렸지만, 키케로에게는 단 한 통의 편지도 보내지 않았다. 이는 키케로가 카이사르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 것에 대한 반감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비불루스는 시리아를 연이어 약탈하고 있던 파코로스 1세와 그의 아버지이자 파르티아의 샤한샤인 오로데스 2세 사이를 이간질했다. 그 결과 파코로스 1세는 군대를 유프라테스 강 너머로 철수시켰고, 시리아 속주는 한동안 평화를 얻었다고 한다. 또한 카시우스에 따르면,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는 비불루스에게 두 아들을 살해한 자들을 사슬로 묶어 보내줬지만, "원로원은 처벌할 권리가 있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다"라며 돌려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기록과 교차검증되지 않기 때문에, 이 기록이 사실인지는 불확실하다.
기원전 50년 가을, 비불루스는 재차 아만 산을 공격해 부족들을 성공적으로 복종시켰고, 시리아를 일시적으로 안정시켰다. 하지만 그는 파르티아인들이 내년 여름에 다시 침공할 거라고 예측하며 증원군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폼페이우스는 이를 핑계로 카이사르에게 "파르티아 원정을 일으키려 하니 2개 군단을 보내라"고 요구했고, 카이사르는 그 요구에 따랐다. 하지만 그 군단들은 정작 시리아로 가지 않고 이탈리아에 남아 폼페이우스의 무력 기반이 되었다.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한 기원전 49년 3월, 그는 이탈리아에 도착하여 포르미아에 거주하던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브룬디시움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있던 폼페이우스와 합류했다. 그해 가을 아드리아 해를 건너 테살로니카에 정착하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았다. 폼페이우스는 그에게 함대 지휘권을 맡겼다. 이때까지 함대를 이끈 적이 없던 그였지만, 카이사르에 대한 복수심 때문인지 함대를 훌륭히 이끌었다. 그는 이피로스와 일리리아 해안에 있는 코르푸 섬에 주력 함대를 주둔시키고, 카이사르가 이탈리아 남부에서 발칸 반도로 넘어가는 걸 막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임무를 착실히 수행했지만, 겨울이 되자 아드리아 해와 이오니아 해가 강한 폭풍으로 항해하기 어렵게 되자 배를 부두에 두고 노 젓는 사람들을 육지로 보냈다. 카이사르는 바로 이 때를 노려 기원전 48년 1월 5일 7개 군단을 이끌고 일리리아 해안가에 기습적으로 상륙했다.
카이사르에게 한방 먹었지만, 그는 카이사르의 추가 병력이 뒤따라 건너는 걸 막기로 했다.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가 추가 부대를 수송하고자 이탈리아로 돌아가는 걸 중도에 따라잡아 30척의 배를 포획하고, 선원들과 함께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푸피우스는 이탈리아로 가까스로 도피했다가, 기원전 48년 1월 말 비불루스가 악천후를 피해 항구로 돌아간 틈을 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다시 한 번 기습적으로 바다를 건너 발칸 반도에 상륙했다. 이에 비불루스는 서부 발칸 반도의 거의 모든 항구를 공략하여 카이사르군의 해상 수송로를 원천 봉쇄했다. 한 번은 적선 한 척이 동쪽으로 항해하다가 포획되었는데, 그 배에는 병사가 없었고 노예와 어린이 몇 명을 포함한 일반 선원들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인정사정 보지 말고 모두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브룬디시움 등 이탈리아의 항구도시들을 공격했으며, 아예 배를 육지에 두는 걸 그만두고 해상에서 먹고 자면서 카이사르 휘하 함대가 기습적으로 발칸 반도에 들어갈 가능성을 원천 차단했다. 카이사르는 이에 맞서 이피로스의 해안 도시들을 하나둘씩 공략했고, 비불루스 함대는 차츰 식량, 물, 땔감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카이사르가 휴전 협상을 제안하는 걸 거부하고, 적군의 보급로를 끊는데 집중했다. 이렇듯 육지에서 쉬질 않고 바다를 떠돌면서 건강이 악화되었고, 결국 중병에 걸렸다. 부하들은 일단 상륙해서 치료를 받으라고 권했지만, 비불루스는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결국 기원전 48년 2월 말에 코르푸 섬 인근 해상에 띄워진 배 안에서 사망했다. 그의 사망으로 폼페이우스 함대의 해상 봉쇄가 완화되었고, 카이사르 측은 이 틈을 타 보급품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두 아들은 이집트에서 피살되었고 셋째 아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는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양자가 되었고, 나중에 브루투스의 전기를 집필했다. 딸 칼푸르니아는 명망 높은 로마 작가이자 정치가였던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와 결혼했고, 기원전 3년 집정관을 역임한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메살리누스와 딸 발레리아 메살리나[2]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