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투스 안니우스 밀로 라틴어: Titus Annius Milo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48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루카니아 지역 콤프사 |
지위 | 평민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티투스 안니우스 루스쿠스(외할아버지) 가이우스 파피우스 켈수스(아버지) 파우스타 코르넬리아(아내) |
직업 | 로마 공화국 호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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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정치인.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에 대항하여 정치테러를 자행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기원전 52년 1월 풀케르 살인을 주도해 로마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난 원인을 제공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아 추방되었다. 기원전 4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대항한 반란에 가담했다가 피살되었다.2. 생애
로마의 평범한 평민 집안이었던 파피우스 가문의 자제로, 아버지 가이우스 파피우스 켈수스는 이름만 전해질 뿐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았다. 일찍이 외할아버지인 티투스 안니우스 루스쿠스에게 입양되어 티투스 안니우스 파피아누스가 되었다. 그가 '밀로(Milo)'라는 이름을 받은 경위와 의미는 전해지지 않는다.기원전 57년 호민관에 선출되었는데,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적극적인 후원 덕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뜻을 사사건건 거스르는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를 견제하기 위해 풀케르에 의해 추방되었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를 로마로 복귀시키려고 했다. 밀로는 폼페이우스의 뜻에 따라 키케로 복귀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였고, 원로원은 기원전 57년 1월 23일 키케로의 복귀를 공식 안건으로 내놓았다.
클로디우스가 이를 막고자 추종자들을 이끌고 포럼을 점거한 뒤 정치테러를 자행하자, 밀로는 검투사 무리를 고용하여 대항했다. 이로 인해 많은 이가 죽거나 중상을 입는 등 혼란이 가중되면서 키케로 복귀 문제가 미뤄지자, 폼페이우스는 지지자들을 로마로 소환하여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클로디우스는 7월 5일에서 13일 사이의 루디 아폴로나레스 경기가 열릴 때 또다시 소요를 일으켰지만, 오히려 민심의 이반만 초래하고 말았다. 렌툴루스는 소요를 계기로 망명자의 귀환을 막으려는 자는 누구든지 공공의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했고, 원로원은 8월 1일 키케로의 복귀안이 통과될 때까지 모든 공공 활동을 중단하기로 했다. 사흘 후 민회에서 이 문제가 논의될 때, 클로디우스는 지지자들을 포럼에 모아 법의 통과를 막으려 했지만,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무장 세력에 의해 해산되었다.
클로디우스는 최후의 방책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군사 개입을 할 수도 있다고 위협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리하여 키케로의 복귀안이 통과되었고, 키케로는 기원전 57년 8월 말에 이탈리아에 돌아왔다. 뒤이어 자유의 신전을 다른 곳에 옮기고 키케로의 집을 재건하기로 했다. 클로디우스 일당은 집을 재건중이던 인부들을 공격하고 키케로의 동생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집에 불을 지르는 등 정치 테러를 이어갔지만, 밀로를 따르는 패거리들이 이를 막았기 때문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기원전 56년 조영관에 부임한 풀케르는 민심을 끌어들이기 위해 거대하고 화려한 검투 및 경마 경기를 연이어 벌이는 한편, 키케로의 집을 경비하기 위해 무장 요원들을 고용한 밀로를 공공 폭력 혐의로 기소했다. 그러나 밀로의 재판은 클로디우스 패거리와 밀로 패거리 간의 격렬한 시가전으로 인해 반복적으로 방해받았고, 결국 풀케르는 고소를 취하해야 했다.
기원전 53년 여름, 밀로는 차기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기로 했다. 당시 집정관 선거엔 그의 정적인 풀케르, 메텔루스 스키피오, 그리고 푸블리우스 플라우티우스 힙사이우스도 출마했다. 그는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동맹을 맺었고, 풀케르는 푸블리우스 플라우티우스 힙사이우스와 손을 잡았다. 양자가 곧 패거리들을 동원해 대규모 시가전을 벌이면서 로마는 대혼란에 휩싸였고, 선거일은 기원전 52년 1월로 연기되었다. 그러던 기원전 52년 1월 17일, 풀케르는 친구 2명과 무장한 노예 30명과 함께 로마를 떠나 아리치아로 가서 하룻밤을 보낸 뒤, 다음날 로마에 돌아와 보빌레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 들렀다. 같은 날 밀로도 로마를 떠나 사제 선출을 주관해야 하는 라누비움으로 갔다.
당시 밀로는 아내 파우스타 코르넬리아와 함께 마차를 탔으며, 수많은 노예와 무장한 검투사들의 호위를 받았다. 그러다가 기원전 52년 1월 18일 오후, 밀로 무리는 보빌레의 보나 데아 신전에서 풀케르의 무리와 마주쳤다. 양측은 일단 이 자리에서 싸우고 싶지 않았기에 서로를 외면한 채 지나쳤는데, 도중에 밀로 측 추종자 몇 명이 풀케르를 향해 야유를 보냈다. 이에 열받은 풀케르 측 지지자들이 그들을 향해 달려들면서 패싸움이 벌어졌다. 그 결과 풀케르의 추종자들이 밀로가 고용한 투사들에게 압도당했다. 클로디우스는 밀로의 부하 비리아에게 공격당해 어깨에 중상을 입고 근처 선술집으로 피신했지만, 곧 체포되어 길거리로 끌려나온 뒤 밀로의 부하들에게 잔혹하게 짓밟혀 목숨을 잃었다. 시신은 한동안 길가에 버려졌다가, 뒤늦게 수습되어 팔라티노 언덕에 있는 그의 저택에 안치되었다.
풀케르가 살해된 뒤, 밀로는 로마로 돌아와서 그에게 뇌물을 받은 호민관 마르쿠스 카일리우스 루푸스의 주재 하에 열린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에 참석한 배심원들 역시 뇌물을 받은 상태였기에, 그가 무죄 판결을 받는 것은 시간문제인듯 했다. 그러나 밀로가 자신을 변호하는 연설을 하고 있을 때, 뇌물을 받지 않은 호민관과 군중들을 비롯하여 풀비아의 선동을 들은 푸블리우스의 지지자들이 포럼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무기를 휘두르며 뇌물을 받은 자들을 몰아냈고, 밀로와 마르쿠스 카일리우스 루푸스는 노예로 변장하여 탈출했다. 이 상황을 이용한 강도들은 두 사람을 찾고 있다는 명분을 걸고 여러 집에 침입해 강도질을 했다. 이후 풀케르의 추종자들이 풀케르의 시신을 쿠리아 호스틸리아(원로원 의사당)에 옮긴 뒤 건물에 불을 질렀다. 불길은 곧 사방으로 번졌고, 급기야 쿠리아 호스틸리아를 비롯한 여러 유서깊은 건물들이 파괴되었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원로원은 특단의 조치로 집정관 선거를 취소하고 폼페이우스를 독재관으로 선출해 혼란을 수습하려 했지만, "독재관이 아니라 단독 집정관으로 선출하라"는 소 카토 등의 강한 요구에 따라 단독 집정관으로 선출했다. 그 후 폼페이우스는 폭동 주동자들을 대거 처형하여 혼란을 잠재웠다. 밀로는 사태가 수습된 후인 52년 4월 9일에 법정으로 소환되었다. 그는 키케로에게 자신을 변호해달라고 요청했고, 키케로는 자신이 로마로 돌아올 수 있게 힘써준 그를 위해 변호했다. 키케로의 밀로 변호는 나중에 "프로 밀로네(Pro Milone: 밀로를 위한 변호)"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지만, 정작 재판정에서는 풀케르 추종자들이 죽일듯이 노려보자 겁을 먹고 평소와는 달리 변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밀로는 38 대 13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마실리아(오늘날의 마르세유)로 추방되었고, 그의 재산은 경매로 팔렸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키케로는 프로 밀로네 사본을 밀로에게 보냈다. 밀로는 이것을 읽은 뒤 다음의 답신을 보냈다고 한다.
"당신이 법정에서 같은 연설을 하지 않은 것이 내게 행운이오. 만약 그랬다면 지금 마실리아의 맛있는 붉은 숭어를 즐기지 못했을 테니까!"
카이사르의 내전이 한창이던 기원전 48년, 밀로는 이탈리아로 잠입한 뒤 마르쿠스 카일리우스 루푸스와 합세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루카니아 지역의 코사를 포위 공격하던 중 수비대가 던진 돌에 맞아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딸 파우스타 코르넬리아와 결혼했지만 자식을 얻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