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18 01:28:59

마르쿠스 카일리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카일리우스 루푸스
라틴어: Marcus Caelius Rufus
생몰년도 미상 ~ 기원전 48년
출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사망지 로마 공화국 투리
지위 에퀴테스
국가 로마 공화국
가족 마르쿠스 카일리우스 루푸스(아버지)
직업 로마 공화정 호민관, 조영관, 법무관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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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호민관, 조영관, 법무관. 당대의 탁월한 웅변가로서 명성을 떨쳤으며,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편에 섰지만 나중에 입장을 바꿔 이탈리아에서 반 카이사르 운동을 펼치다가 살해되었다.

2. 생애

에퀴테스 가문인 카일리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아버지 마르쿠스 카일리우스 루푸스는 아프리카를 포함해 수많은 지역에 토지를 보유한 부호였다.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그는 소 가이우스 마리우스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가 집정관인 해의 6월 이전 5일, 즉 기원전 82년 5월 28일에 출생했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고위 행정관들의 취임 가능 연령 제한을 설정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법을 고려할 때 기원전 85년 또는 기원전 88년에 출생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현재로서는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 분명히 밝힐 수 없다.

그는 재정적으로 넉넉한 집안의 든든한 지원에 힘입어 그리스에 유학가서 웅변술을 공부했는데, 그 과정에서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키케로는 그가 잘생기고 매력적인 외모를 갖췄으며, 그의 연설은 훌륭하고 숭고함과 동시에 미묘하고 재치있었다고 평했다. 마크로비우스는 그가 춤에 관한 기술을 갖추고 이를 자랑스러워했다고 밝혔으며, 퀸틸리아누스는 그가 예의에 맞게 말하는 동시에 비난을 곁들이는 훌륭한 말솜씨를 가졌다고 평했다. 가이우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그를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와 비교해 웅변과 용기 모두에서 더 훌륭했다고 설명했다. 소 플리니우스는 그를 키케로,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가장 좋아하는 연설가로 선정했다.

그는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기원전 63년 선거 때 카틸리나를 지지했다. 그러나 카틸리나는 연이어 낙선하자 로마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키케로에게 발각되어 목숨을 잃었다. 그는 이 음모에 가담하진 않았지만 카틸리나와 친분이 있었기에 불똥이 자신에게 튈 것을 우려해 로마를 떠나 아프리카 총독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 휘하의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을 맡았다.

몇 년 후 로마로 돌아온 그는 정치 경력을 본격적으로 쌓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파트리키와 별다른 접점이 없었던 그는 민중의 지지를 확보하기로 했다. 그는 기원전 60년 마케도니아 총독으로서 속주민들을 상대로 심각한 착취를 일삼은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를 루키우스 카니니우스 갈루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함께 고발했다. 히브리다는 지난날 카틸리나를 토벌하는 군대를 직접 이끌었기에, 키케로는 히브리다가 유죄를 선고받으면 카틸리나를 파멸로 몰아넣었던 자신 역시 공격받으리라 짐작하고 히브리다의 편에 섰다. 그러나 히브리다는 유죄를 선고받고 시민권을 박탈당한 뒤 로마에서 쫓겨났다.

당대 최고의 변론가 키케로를 꺾고 유죄 판결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 그는 훌륭한 변론가로서 명성을 구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에 자만했기 때문인지, 그는 몇년간 방탕한 생활을 했다. 팔라티노 언덕에 있는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별장을 10,000 세스테르티우스에 임대한 뒤 거기서 음주와 연애를 즐겼다. 특히 클루디우스의 여동생인 클라우디아 테르티아와 불륜 관계를 맺었다. 시인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카툴루스 역시 클라우디아 테르티아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그녀가 루푸스와 어울려 지내면서 자신을 등한시하자 배신감을 느끼고 루푸스를 공격하는 풍자시를 여러 편 작성했다. 한 시에서는 루푸스의 겨드랑이 냄새가 너무 심해서 모든 여자가 그에게서 도망쳤다고 비꼬았고, 다른 시에서는 클라우디아의 도덕적 타락을 이끌어낸 인물로 '카일리우스'를 지목하기도 했다.

그는 이렇듯 방탕한 삶을 사는 와중에도 연설 및 정치 경력을 꾸준히 이어갔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포로 로마노를 동료들보다 자주 방문하고 법정 사건에 더 많이 관여해 탁월한 웅변술을 발휘했다고 한다. 기원전 59년 재무관을 역임했으며, 루페르칼리아 축제를 주관하는 사제단의 일원으로 발탁되었다. 기원전 56년 지난날 조영관을 맡았던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베스티아를 유권자들에게 뇌물을 줘서 조영관에 당선된 혐의로 고발했지만 패소했다.

그 후 루키우스 셈프로니우스 아트라티누스의 양자이자 베스티아의 친자인 루키우스 셈프로니우스 아트라티누스가 이에 대한 보복으로 그를 나폴리에서 폭동을 조직하고 푸테올리에서 이집트 사절단을 공격하고 사절단 대표 디온을 독살하려 시도한 혐의로 고발했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이 무렵에 클라우디아 테르티아와 사이가 틀어졌고 클로디우스와도 반목했다고 한다. 그래서 클로디우스는 아트라티누스를 지원해 그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려 했다. 하지만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키케로가 루푸스를 변호해줬고, 그는 기원전 56년 4월 1일에 열린 재판에서 클로디우스와 클라우디아 남매가 서로 성관계를 맺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자신의 혐의를 효과적으로 부정했다. 결국 그는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키케로에 따르면, 클로디우스 남매는 기원전 54년에 재차 루푸스를 고발했지만 법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고 한다.

기원전 52년, 루푸스는 호민관에 선임되었다. 이 무렵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의 추종자들이 클로디우스를 살해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는 밀로의 부탁을 받아들여 재판에서 그를 변호해주기로 했다. 아피아노스는 그가 뇌물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이전부터 클로디우스와 심각한 갈등을 벌이고 있던 것을 고려했을 때 뇌물을 받지 않았더라도 밀로를 기꺼이 변호했을 것이다. 재판에 참석한 배심원들은 밀로에게 뇌물을 받은 상태였기에, 그가 무죄 판결을 받는 것은 시간문제인듯 했다. 그러나 밀로가 자신을 변호하는 연설을 하고 있을 때, 뇌물을 받지 않은 호민관과 군중들이 포럼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무기를 휘두르며 뇌물을 받은 자들을 몰아냈고, 밀로와 루푸스는 노예로 변장하여 탈출했다. 이 상황을 이용한 강도들은 두 사람을 찾고 있다는 명분을 걸고 여러 집에 침입해 강도질을 했다. 이후 풀케르의 추종자들이 풀케르의 시신을 큐리아 호스틸리아에 옮긴 뒤 건물에 불을 질렀다. 불길은 곧 사방으로 번졌고, 급기야 원로원 건물을 비롯한 여러 유서깊은 건물들이 파괴되었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원로원은 특단의 조치로 집정관 선거를 취소하고 폼페이우스를 독재관으로 선출해 혼란을 수습하려 했지만, "독재관이 아니라 단독 집정관으로 선출하라"는 소 카토 등의 강한 요구에 따라 단독 집정관으로 선출했다. 그 후 폼페이우스는 폭동 주동자들을 대거 처형하여 혼란을 잠재웠다. 밀로는 사태가 수습된 후인 52년 4월 9일에 법정으로 소환되었다. 그는 키케로와 함께 밀로를 도왔지만, 여론이 워낙 극렬했기 때문에 밀로가 추방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다만 역시 재판에 회부된 밀로의 추종자들을 변호해 상당수가 무죄 판결을 받아내도록 이끌어냈다. 키케로는 "그처럼 폭도들의 난동과 고함에 맞서 원로원과 훌륭한 시민을 옹호한 이는 없다"라며 찬사를 보냈다.

기원전 51년 초 키케로가 킬리키아 총독으로 부임했을 때, 그는 로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서면으로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이 약속을 지켰고, 키케로는 루푸스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뒀다. 훗날 키케로의 친구인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가 이 서간집을 정리해 출간했다. 기원전 50년 조영관에 당선된 그는 키케로에게 로마 시민들이 경기를 즐기게 해주고 싶으니 표범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키케로는 이에 대해 시민들을 생각하는 그의 마음씨를 칭찬하면서도 완곡하게 거절했다.
"총독으로서 속주민들이 동물을 잡도록 강요해 그들의 힘을 소진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키케로 대신 쿠리오로부터 동물을 제공받고 상당히 큰 규모의 경기를 주관했다고 전해진다. 그렇지만 이 일로 키케로에게 불만을 가지지는 않았는지, 키케로가 킬리키아에서 이민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는 소식을 듣고 원로원에 신들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자는 제안을 해 관철시켰다.

이 무렵, 키케로의 전임 총독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키케로의 사위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에게 고발당했다. 풀케르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의 지원을 받자, 돌라벨라는 키케로와 루푸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척지고 싶지 않았던 두 사람에게 거절당했다. 그 결과, 아피우스는 무죄 판결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아피우스와 모종의 사유로 갈등을 벌이기 시작했다. 아피우스는 그가 로마의 고위 사제 계급인 아우구르(Augur)에 출마하자 그는 너무 문란해서 그 직책을 맡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에 맞서 아피우스의 도덕성을 비난했다. 그는 이 문제로 인해 아우구르에 끝내 선출되지 못했다.

한편, 갈리아 전쟁에서 승리하여 로마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옵티마테스의 지원을 받은 폼페이우스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그는 기원전 50년 8월에 이 문제에 관해 키케로에게 "이 일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모르겠다"고 호소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는 아피우스가 폼페이우스 편에 든 것을 혐오했고, 친구 돌라벨라와 쿠리오가 카이사르 편에 섰으니 그 쪽으로 마음이 끌린다고 고백하면서도, 카이사르 본인의 정치 성향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는 서신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내부 불화에 앞서 시민으로서 싸우면서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더 정직한 편에 서야 합니다. 나는 원로원에 앉아 있으면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편에 선 사람들이 심판을 내리려 하리라 예상합니다. 두려움과 희망 없이 사는 사람들은 카이사르에게 끌려갈 것입니다. 군대와 비교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과 다른 것의 힘을 평가하고 편을 선택할 충분한 시간이 있을 겁니다!"

기원전 49년 1월 1일 원로원 회의에서, 그는 폼페이우스를 히스파니아 속주로 보내 내전을 피하자는 주장을 지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월 7일 원로원이 카이사르를 국가의 적으로 단죄하는 선언서를 통과시키자, 그는 카이사르의 편에 서기로 마음먹고 쿠리오와 퀸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라미니로 가서 카이사르와 합세했다. 이는 카이사르의 군사적 이점을 고려한 선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서도 키케로에게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양자를 비판하는 어조로 평하는 등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기원전 49년 3월, 카이사르는 그에게 4개 코호트를 맡겨 리구리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부족들을 토벌하게 했다. 이후 4월에 히스파니아로 출진하면서 루푸스를 레가투스로 삼아 데려갔다. 히스파니아 원정이 마무리된 뒤, 카이사르는 그를 기원전 48년도 법무관에 선임했다. 그러나 그는 가장 영예로운 도시 법무관(praetor urbanus)이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에게 돌아가고 자신은 외국인 법무관(praetor peregrinus)이 된 것에 반감을 품었다. 기원전 48년 2월에 키케로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그는 자신이 슬픔과 분노에 휩싸였으며 쿠리오에 대한 우정과 풀케르 가문에 대한 적대감으로 인해 카이사르에 협조한 것을 후회한다고 고백했다.

그는 폼페이우스 편으로 들어가기로 했지만, 발칸 반도로 가서 폼페이우스와 합류하는 대신 이탈리아에서 반기를 들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포럼에서 트로보니우스의 의자 옆에 법무관의 의자를 놓고 거기에 앉은 뒤 부채 지불 및 재산 평가에 대한 판사들의 판정에 불복한 이들의 항소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지난 6년간의 부채에 대한 이자를 탕감한다는 법안을 발의했다. 집정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가 이에 반대하자 철회했지만, 뒤이어 지난 1년간의 임대료를 폐지하고 모든 부채를 탕감한다는 더욱 급진적인 법안을 발의했다. 트레보니우스는 나라를 망치는 일이라며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카일리우스의 지지자들에 의해 포럼에서 쫓겨났다.

카이사르파가 장악한 원로원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루푸스에게 법안을 철회하도록 권고했다. 그가 거절하자, 이사우리쿠스는 루푸스의 직위를 박탈하기로 결정한 원로원의 뜻에 따라 루푸스를 포럼에서 내쫓으려 했다. 루푸스가 의자에서 일어나려 하지 않자, 그는 채찍을 들어 루푸스를 내리쳤다. 루푸스는 결국 자리를 피하면서도, "아버지에게 채찍을 얻어맞더니 나한테 똑같은 짓을 한다"라고 조롱했다.

그 후 루푸스는 봉기를 일으키기 위해 이탈리아 남부로 가서 망명지에서 비밀리에 이탈리아로 돌아온 밀로와 합세한 뒤 추종자들을 무장시킨 후 루카니아 지역의 코사 시를 포위 공격했으나 수비대에게 패했고, 밀로는 그 과정에서 수비대가 던진 돌에 맞아 죽었다. 그는 투리 시로 후퇴한 뒤 주민들의 반란을 선동했고, 도시에 주둔한 갈리아 병사와 스페인 기병에게 뇌물을 건넸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받기를 거부하고 그를 처단했다. 키케로는 훗날 저서 <브루투스>에서 그는 본래 훌륭한 시민이었지만 나중에 자신의 길을 포기하고 자신이 타도했던 포풀라레스의 길을 걷다가 죽었다며 안타까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