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 라틴어: Quintus Caecilius Metellus Nepos | |
생몰년도 | 기원전 100년 ~ 기원전 55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디아데마투스(조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아버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양아버지) 켈리아(어머니)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형제)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57년 |
전임 |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
동기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 |
후임 |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켈리누스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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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기원전 2세기부터 고대 로마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대를 이어 집정관을 역임한 노빌레스 가문인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부는 기원전 117년 집정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디아데마투스이고, 아버지는 기원전 90년 호민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다. 어머니 켈리아는 남편과 사별한 뒤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와 결혼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세번째 아내가 될 무키아 테르티아를 낳았다. 형제로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가 있었다.그는 일찍이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의 양자가 되었다. 학자들은 그가 집정관 선거에 도전한 시기와 고위 행정관의 특정 연령 기준을 설정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법에 의거해 그의 출생년도를 기원전 100년으로 정했다. 그는 기원전 80년 형제 켈레르와 함께 시칠리아 총독으로서 속주민들을 착취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를 고발했다. 많은 학자들은 두 형제가 레피두스를 견제하려 한 술라의 지원을 받았으리라 추정한다. 폼페이우스는 이에 대응해 피고인의 편을 들자 민심은 레피두스 편으로 쏠렸고, 두 형제는 이부 누이인 무키아 테르티아의 남편과 대립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고발을 취소했다.
그는 기원전 77년 푸블리우스 가비니우스를 아카이아 속주민 착취 혐의로 고발했고, 기원전 70년 시칠리아에서 착취를 자행한 가이우스 베레스 총독을 고발하는 대열에 합세했다. 기원전 67년 폼페이우스가 지중해 해적을 토벌하는 임무를 맡았을 때, 그는 폼페이우스의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을 맡아 소아시아와 페니키아 해안에서 해적들을 몰아붙이는 임무를 맡았다. 이후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형제 켈레르와 함께 폼페이우스를 따랐고, 기원전 64년 루키우스 롤리우스와 함께 다마스쿠스를 점령했다.
기원전 63년 로마로 돌아와 기원전 62년도 호민관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지난해 집정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와 갈등을 빛었다. 키케로는 카틸리나 지지자들을 재판 없이 즉결 처형한 것에 대해 민중에 설명하기 위해 기원전 62년 1월 1일 연단에 섰지만, 그는 거부권을 행사해 연설을 금지했다. 키케로는 친척들에게 "나는 가장 무가치한 시민에게 굴복하지 않았거늘 가장 보잘 것 없는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자에게 모욕당했다"라며 분노에 찬 서신을 보냈다. 키케로는 인맥을 통해 네포스와 협상을 시도했지만 거부당했다. 이후 키케로와 네포스간의 갈등이 원로원과 민회에서 일어났다. 그는 키케로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고, 키케로는 이에 맞서 그가 폼페이우스의 퇴역병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려 하는 농지법을 통과시키는 것을 막아섰다.
한편, 네포스는 폼페이우스를 이탈리아로 긴급 소환해서 에트루리아에서 군대를 모으고 있는 카틸리나를 토벌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동료 호민관 소 카토가 강력하게 반대했다. 민회를 소집한 그는 검투사, 해방노예들을 대동해 포로 로마노에 나타났다. 그가 연단에 서서 자신의 계획을 발표하려 할 때, 카토가 돌연 나타나 그에게서 두루마리를 뺏은 뒤 찢어버렸고, 또다른 호민관 퀸투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가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이후 양측 지지자들 사이에 폭력 사태가 일어나는 바람에 민회는 해산되었고, 원로원은 비상 사태를 선포했다. 그는 이 일로 호민관에서 물러난 뒤 폼페이우스가 있는 동방으로 도피했다.
기원전 60년, 그는 폼페이우스와 함께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러나 폼페이우스가 이부 여동생 무키아 테르티아와 이혼한 뒤, 그는 형제 켈레르와 함께 폼페이우스의 정적이 되었다. 그 해 법무관에 취임한 그는 이탈리아 항구에서 관세를 철폐했다. 기원전 59년 켈레르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켈레르가 맡던 고위 사제 계급인 아우구르(Augur)의 일원이 되었다. 기원전 57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와 함께 집정관에 취임한 뒤 지난 해 호민관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정치 공세로 인해 망명해야 했던 키케로의 복귀에 관해 논의했다. 키케로는 그가 지난날 자신과 심하게 대립했던 것 때문에 복귀를 반대할까 두려워했지만, 네포스는 키케로의 귀환을 찬성했다. 그러면서도 클로디우스를 고발한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의 재판 개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클로디우스가 조영관 선거에 출마하는 것을 지원했다.
집정관 임기를 마친 후 가까운 히스파니아 속주에 부임한 그는 바케이 족의 반란에 직면했다. 처음에는 몇 차례 승리를 거뒀지만 반란군이 클루니아 시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을 때 병력이 부족해서 억제하지 못했다. 기원전 55년 후임자에게 직임을 넘기고 로마로 돌아온 그는 곧 사망했다. 당시 결혼을 하지 않아 자녀가 없던 그는 다른 친척들을 제쳐놓고 가이우스 카리나스에게 재산을 물려줬다. 카리나스는 기원전 43년 보결 집정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