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푸피우스 게미누스 라틴어: Gaius Fufius Gemin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미상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로마 제국 |
가족 | 푸피우스 게미누스(아버지 또는 삼촌) 비티아(아내) 가이우스 푸피우스 게미누스(아들)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년 |
전임 |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카니니우스 갈루스 |
동기 | 루키우스 카니니우스 갈루스 |
후임 | 루키우스 카니니우스 갈루스 퀸투스 파브리키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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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집정관.2. 생애
기원전 35년에 판노니아 총독을 역임한 푸피우스 게미누스의 아들 또는 조카인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2년 루키우스 카니니우스 갈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그는 루키우스 카니니우스 갈루스와 함께 <푸피아 카니니아 법>(Lex Fufia Caninia)을 반포했다. 이 법은 유언을 통해 공식적으로 노예 상태에서 해방될 수 있는 노예의 수에 제한을 두었다. 법학자 가이우스에 따르면, 유언으로 해방할 수 있는 노예의 수는 재산의 규모에 비례하여 아래와 같이 규정되었다.1. 노예를 한 명이나 두 명만 보유하고 있을 경우, 유언자는 노예를 자유롭게 해방할 수 있다.
2. 노예를 3명에서 10명까지 보유할 경우, 절반 이상을 해방할 수 없다.
3. 10명 이상에서 30명까지 보유할 경우, 3분의 1 이상을 해방할 수 없다.
4. 30명 이상에서 100명까지 보유할 경우, 4분의 1 이상을 해방할 수 없다.
5. 100명 이상에서 500명까지 보유할 경우, 5분의 1 이상을 해방할 수 없다.
6. 노예 보유 규모에 관계없이, 100명까지만 해방할 수 있다.
2. 노예를 3명에서 10명까지 보유할 경우, 절반 이상을 해방할 수 없다.
3. 10명 이상에서 30명까지 보유할 경우, 3분의 1 이상을 해방할 수 없다.
4. 30명 이상에서 100명까지 보유할 경우, 4분의 1 이상을 해방할 수 없다.
5. 100명 이상에서 500명까지 보유할 경우, 5분의 1 이상을 해방할 수 없다.
6. 노예 보유 규모에 관계없이, 100명까지만 해방할 수 있다.
또한 사망자에게 속한 도망 노예는 재산에 있는 노예 총 수의 일부로 계산되었고, 해방될 각 노예는 유언장에 이름이 기재되어야 했다. 다만 유언장이 작성될 당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름이 있는 여성 노예의 자녀를 해방하는 것과 같이 별도의 설명이 기재될 수 있었다. 이 법이 도입된 목적은 주인이 노예를 무차별적으로 해방해 장례 의식에 참여하도록 해, 애도자를 최대한 불려서 사회적 위상을 드높이지만 살아있는 후계자에게는 재산 피해를 입히는 세태가 벌어지는 걸 방지하는 데 있었다. 경제사학자 피터 테민(Peter Temin, 1937 ~)은 이 법을 노동 시장 관점에서 노예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제한된 해방 기회 중 하나를 얻도록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법이라고 추정했으며, 영국 사학자 피터 애스트버리 브런트(Peter Astbury Brunt, 1917 ~ 2005)는 노예 소유주가 로마 시민으로서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는 노예만 해방하도록 장려하기 위한 조치라고 추정했다.
그는 몇 달간 집정관 직임을 수행하다가 12월 1일에 퀸투스 파브리키우스로 교체되었다. 학자들은 그가 재임 중에 사망했거나 대 율리아 스캔들에 연루되어 추방된 뒤 집정관 명단에서 배제되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는 비티아라는 아내와 결혼해 아들 가이우스 푸피우스 게미누스를 낳았다. 아들 게미누스는 서기 29년 집정관이 되었지만 나중에 반역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자 목숨을 끊었다. 어머니 비티아는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티베리우스에게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