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 라틴어: Quintus Fufius Calen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40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갈리아 |
지위 | 평민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아버지)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아들) 푸피아(딸) |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47년 |
전임 | 율리우스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 |
동기 |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 |
후임 |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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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정치인, 군인. 갈리아 전쟁에 참전했으며, 카이사르의 내전 때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장군으로서 활약했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부관으로 들어가 갈리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2. 생애
2.1. 정치 초반까지
평민 집안인 푸피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키케로의 필리피카이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는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를 살해한 일을 칭송했다고 한다. 일부 역사가들은 칼레누스가 캄파니아 지방의 칼라 시와 관련있을 거라며, 아버지 푸피우스는 캄파니아 지주로서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법 때문에 손해를 입게 되자 반감을 품었을 거라고 추정한다.기원전 74년경에 주조된 주화에 '칼렌(Kalen)'이라는 단어가 있는 것을 볼 때, 젊은 시절에 동전을 주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의 통치 기간에 정치 활동을 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기원전 61년경 호민관을 맡았는데, 이 시기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가 여자들만 모일 수 있는 여신전에 몰래 들어간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자 클로디우스를 돕기 위해 법무관이 배심원을 구성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이 통과되는 걸 막으려 했다. 이 법이 통과된다면 클로디우스에게 적대적인 법무관들이 유죄 판결을 이끌어내려고 배심원들을 임의로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안이 체택되자, 그는 폼페이우스에게 이 법안을 지지하는지 물었지만 속시원한 답을 듣지 못했다. 그래도 클로디우스는 여신전 행사에 참석했을 때 그를 보지 못했다고 진술한 여성들과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역임하고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적극적인 협력에 힘입어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2.2. 카이사르 시대
기원전 59년 법무관을 맡아 동료 집정관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와 대립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지지하여 삼두정치파의 일원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이후 삼두정치의 인기가 크게 떨어지면서 그의 위상도 위축되었고, 그는 정계에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기원전 56년 마르쿠스 카일리우스 루푸스의 재판 때 고소인 측 증인이 되었고, 52년 초에는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 암살과 관련된 원로원 토론에 참여하여 클로디우스 암살에 연루된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를 비호했다.기원전 51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부관으로서 갈리아 전쟁에 참여해 옥셀로두눔 공방전에서 일정 역할을 수행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카이사르의 편에 섰다. 그해 3월 10일 키케로와 만났을 때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이 전쟁을 촉발했다고 비난해, 키케로로부터 "부주의함과 어리석음을 보여줬다"는 비평을 받았다. 이후 카이사르의 이베리아 원정과 마실리아 공방전에 참가했다. 기원전 49년 말 브룬디시움에서 에피로스로 카이사르와 함께 해상으로 이동했다. 그 직후 나머지 군대를 데려가기 위해 이탈리아로 갔지만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가 지휘하는 폼페이우스 함대의 공격으로 30척의 배를 포획당하고 이탈리아로 가까스로 도피했다. 기원전 48년 1월 말 비불루스가 악천후를 피해 항구로 돌아간 틈을 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발칸 반도에 군대를 이동시켰다.
그는 카이사르로부터 발칸 반도 남부 일대에 대한 원정을 맡아 델포이, 테베 등을 전투 없이 복종시켰다. 아테네와 메가라는 오랫동안 저항했지만 결국 항복했다. 파르살루스 전투 후 폼페이우스 지지자들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거점을 마련하려 했지만, 그는 이들을 몰아내어 그리스 정복을 완료했다. 이후 카이사르에 의해 그리스 총독으로 임명되어 이집트에서 알렉산드리아 전쟁을 치르고 있는 카이사르에게 증원군을 파견했다. 카이사르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기원전 47년 로마로 돌아온 뒤 최측근인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와 함께 집정관으로 세웠다.
2.3. 카이사르 암살 이후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되었고 로마 정계는 혼란에 빠졌다가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해방자파가 타협하면서 겨우 수습되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가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를 나중에 총독으로서 다스리려고 현직 총독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공격하자, 원로원은 키케로의 주장에 따라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고 토벌군을 편성했다. 이리하여 선출된 기원전 43년 집정관 중 한 명이 그의 사위인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 카이트로니아누스였으며, 그는 이 덕분에 원로원 의원 중 가장 먼저 발언할 수 있는 영예를 얻었다. 칼레누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협상을 하자고 제안했고, 원로원은 키케로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절단을 파견했지만, 안토니우스가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서 실패했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가 카이사르의 암살자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를 멋대로 살해하자 그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여 반카이사르파 원로원 의원들의 환심을 사기도 했다.기원전 43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하고 로마로 돌아가 대숙청을 벌일 때, 그는 숙청 명단에 들어있던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를 별장에 숨겨줘서 화를 피할 수 있게 했다.[1] 기원전 42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필리피 전투를 치르기 위해 발칸 반도로 이동했을 때, 그는 이탈리아에 남겨진 2개 군단을 지휘했다. 기원전 41년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의 총독을 맡았다.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가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페루시아에서 포위된(페루시아 내전) 루키우스 안토니우스[2]와 풀비아[3]를 구하기 위해 이동했을 때, 그는 갈리아 트란살피나에 주둔한 11개 군단을 이끌고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이탈리아로 진공하려 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4] 그러나 기원전 40년 중반에 질병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아들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는 이 군단들을 옥타비아누스에게 넘겨줬고, 결국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풀비아는 내전에서 패하여 안토니우스에게 도주했다. 이를 통해 원래 칼레누스를 통해 안토니우스의 세력권이었던 갈리아가 옥타비아누스에게 넘어가게 되어 안토니우스는 서방에서의 발판을 잃었다.
그는 동명이인인 아들 외에도 딸 푸피아를 두었다. 푸피아는 기원전 43년 집정관이었던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 카이트로니아누스와 결혼했지만 자식을 갖지 못했다.
[1] 사실 인물 문서에 나오지만, 바로는 본래 폼페이우스파 출신으로 카이사르의 내전 당시 에스파냐 지방을 맡았다가 카이사르에게 항복을 받았다. 이후 뚜렷한 정치 활동 없이 조용히 지냈고, 카이사르가 계획했던 로마 최초의 공공 도서관 조직을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다. 비록 칼레누스에 의해 목숨은 건졌지만, 이 일로 그는 직위와 재산을 엄청 내놓아야 했다.[2]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3]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아내[4] Anna B. Miaczewska, Quintus Fufius Calenus, a forgotten career, Hermathena,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