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라틴어: Gaius Claudius Marcellus | |
생몰년도 | 기원전 88년 ~ 기원전 40년 5월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조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아버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사촌) 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사촌) 유니아(어머니) 소 옥타비아(아내)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장남)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장녀)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차녀) |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50년 |
전임 |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
동기 |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 |
후임 | 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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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군인, 정치인. 옵티마테스파 인사로, 카이사르의 내전 때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맞섰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로마로 진군하자 이탈리아를 떠나지 않고 귀순했고, 이후에도 정계에서 활동했다.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소 옥타비아의 남편이다.2. 생애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명문 귀족 집안인 클라우디우스 씨쪽의 평민 방계 집안인 마르켈루스 가문의 일원이다. 고조부는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한니발 바르카를 상대로 혈투를 벌이고 시라쿠사 공방전을 승리로 이끈 명장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이며, 조부는 기원전 166년, 155년, 그리고 152년에 집정관을 역임한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이다. 그는 아들 마르쿠스와 가이우스를 낳았는데, 첫째 아들 마르쿠스는 기원전 91년 수석 조영관을 맡았으며, 기원전 73년 키케로가 시칠리아 전 총독 가이우스 베레스를 고소했을 때 법관을 맡은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반면 둘째 아들 가이우스는 이름만 알려졌을 뿐 행적은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그는 유니아라는 여인과 결혼했는데, 이 여인은 기원전 138년 집정관을 역임한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칼라이쿠스의 딸로 추정된다. 두 사람 사이에서 낳은 아들 가이우스가 바로 이 문서의 주인공이다. 한편 그에겐 이름이 같은 사촌 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있었는데, 그는 기원전 49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기원전 62년 카틸리나 음모에 연루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변호를 맡으려 했으나 거절당했다고 하며, 기원전 56년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에 대항하여 수석 조영관에 출마했을 가능성이 있다. 키케로는 그해 11월 23일 친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마르켈루스 후보가 코를 너무 크게 골아서 멀리서 들리는구려."
행정관직의 나이 제한을 규정한 코르넬리우스 법(술라가 제정한 법)을 고려했을 때, 늦어도 기원전 53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을 것이다. 한편 기원전 54년 경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인척인 소 옥타비아와 결혼했다. 두 부부의 금슬은 매우 좋았지만, 카이사르는 친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 율리아가 기원전 52년에 사망한 뒤 자신의 정치, 사회적 위상 악화와 폼페이우스와의 동맹이 흔들리는 걸 우려하여 옥타비아를 이혼시키고 폼페이우스와 결혼시키려 했다. 하지만 마르켈루스와 옥타비아 둘다 이혼하길 원하지 않았고, 폼페이우스 역시 소 옥타비아를 아끼고 예뻐했을 뿐, 아내 후보로는 아예 생각하지 않아 제안을 듣자마자 단번에 거절하고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딸 코르넬리아 메텔라와 결혼했다.
기원전 50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와 공동 집정관을 맡았다.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임페리움을 에정보다 일찍 박탈할 것을 제안했지만,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의 거부권 행사로 인해 실패했다. 쿠리오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군대를 동시에 해산하자고 주장했고, 기원전 50년 12월 쿠리오의 제안은 원로원에서 압도적인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1] 이 회의를 주재한 그는 원로원 회의를 중단한 뒤, 폼페이우스에게 비상권을 수여할 것을 요구하며 내전을 위한 군대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도 원래 파르티아 원정에 동원하고자 카이사르로부터 받아낸 2개 군단을 폼페이우스에게 넘겨주는 등, 노골적으로 폼페이우스에게 힘을 실어주는 행보를 보였다.
기원전 49년 1월 카이사르가 원로원 최종 권고에 반발하여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하자, 그는 일단 폼페이우스와 함께 수도를 떠났다. 그러나 친척들이 발칸 반도로 건너가 폼페이우스의 군대에 들어간 것과는 달리, 그는 고민 끝에 카이사르와 화해하기로 했다. 키케로는 기원전 49년 3월 6일 친구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결정을 내린 그를 "집정관 직임을 부끄럽게 만든 겁쟁이"라고 비난했다. 카이사르는 자신에게 귀순한 그를 따뜻하게 맞이해줬고, 로마에서 공직을 계속 맡게 해줬다. 그는 몇년 간 카이사르에게 폼페이우스에게 가담했던 친척들을 용서해달라고 청했고, 카이사르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 그의 정치적 중요성이 한동안 치솟았다. 카이사르는 유언장에서 그의 아내 옥타비아의 남동생인 옥타비아누스를 양자로 들이고 재산을 물려주겠다고 밝혔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점을 잘 활용해, 그를 통해 키케로와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한편 그는 키케로의 절친한 친구 아티쿠스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티쿠스는 마르켈루스의 족보를 다룬 책을 집필했는데, 그 책을 써달라고 요청한 이가 바로 그였다. 기원전 40년 5월경에 급병에 걸려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소 옥타비아와의 사이에서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를 낳았다. 아들 마르쿠스는 한때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 여겨질 정도로 촉망받았으나 일찍 죽었고,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는 훗날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율루스 안토니우스의 아내가 되었다.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는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바르바투스 아피아노스와 파울루스 아이밀리아누스 레피두스의 아내가 되었다.
[1] 370명이 찬성했고, 22명 또는 25명이 반대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