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 라틴어: Marcus Livius Drusus Libo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이탈리아 |
사망지 | 로마 제국 이탈리아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로마 제국 |
가족 |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양아버지)[1] 가이우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양아버지, 형)[2] 리비아 드루실라(누나) 리비아 스크리보니아나(딸) 이름 미상의 아들 마르쿠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드루수스(양아들)[3] |
직책 | 아르발 들판 사제단 사제, 원로원 의원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5년 |
전임 |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4] 루키우스 타리우스 루푸스[5] |
동기 |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
후임 |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아우구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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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의 외척, 원로원 의원, 집정관이자 사제.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인 로마 제국 최초의 아우구스타 리비아 드루실라의 동생이며,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외삼촌이다.2. 생애
본래 출신 가문은 로마 공화정 시대의 노빌레스 중 한 가문인 스크리보니우스 일족의 리보 가 출신이다. 리보 가문은 본래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 출신중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가의 피도 흐른 리비우스 가 출신 남성이 노빌레스 가문인 스크리보니우스 일족에 입양되면서, 다른 스크리보니우스 가문에서 분파된 평민 귀족 가문이다. 이 가문의 가족성씨인 리보는 리비우스 가의 변형 형태의 이중성도 담고 있다. 따라서 이들 역시 본래의 혈연적 본가인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가와 성향이 비슷했다.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다만 출생년도는 여러 추정으로 유추 가능하다고 평가받는다. 양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가 기원전 42년 죽었다는 점, 리비아 드루실라가 누나였고,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가 조카로 리보가 티베리우스 형제가 성년식 전까지 이들의 보호자 역을 일부 했다는 점, 기원전 15년 집정관을 지낸 경력 등을 추정한 나이인데, 출생 년도는 누나 리비아 드루실라보다 10살 정도 어린 나이로 대략 기원전 50년대 초반에서 기원전 40년대 후반 경에 태어났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리보의 조카 티베리우스가 기원전 42년생, 대 드루수스가 기원전 38년생이기에, 이들의 보호자 역을 수행한 리보가 티베리우스보다는 최소 5살 정도는 많아야 했기 때문이다. 즉, 리비아 드루실라가 기원전 59년 혹은 기원전 58년생였기 때문에 어려도 기원전 49년 ~ 47년생 정도였다는 추정이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입양을 통해 남매 관계가 된 리비아 드루실라 일가의 혈통적 본가인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과도 혈연상 친척이었다고 한다. 이에 관해 디오 카시우스는,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는 '루키우스의 아들(L.F.)'이나, 리비아 드루실라의 아버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가 본인 친가 쪽 혈육을 본인의 양자 겸 상속자이자, 본인보다 먼저 전사해 죽은 가이우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법적 형제 겸 손자 형태로 지명해 입양했다고 나와 있다. 또 그는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의 이복누나 혹은 딸로 보통 추정 중인 아우구스투스의 전처 스크리보니아의 친척뻘 조카로 언급되나, 스크리보니아의 친조카라는 구절이 없으며, 기원전 34년 집정관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의 친아들이라는 표현이 없다. 따라서 그는 통상적으로 스크리보니아,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의 친혈육보다는 이들과 같은 리보 가문 출신 정도로 평가받는다. 다만, 그는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와 분명 혈연적 관계가 어쨌든 있었는지, 아우구스투스 생전에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의 차남에게 본인의 코그노멘이자 리보 가문의 혈통적 본가라고 할 수 있는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의 코그노멘 드루수스를 쓰게 해줬다고 한다.
리비아 드루실라의 아버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가 친아들 가이우스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내전 중 전사하고 손녀 2명만 있는 관계로, 필리피 전투 전에 일찍이 입양해 키우면서,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 가이우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부자의 공동 양자이자 상속자가 됐고, 필리피 전투 후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가 자결하고 유언장이 공개되면서 정식으로 리보 가문의 혈통적 시작점인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을 물려 받았다. 이때 그는 삼두파에게 양부의 재산이 동결됐지만, 누나 리비아 드루실라가 후일 아우구스투스로 불리게 될 옥타비아누스와 재혼하기 전 상속허가를 받아 일찍부터 부자였다고 알려져 있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 가이우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부자와 법적 부자 관계 겸 상속자였음에도, 옵티마테스가 아니었다. 그는 법적 누나 리비아 드루실라, 매형 아우구스투스, 조카 티베리우스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이들과 신뢰가 매우 두터웠던 인물이었다. 매형 아우구스투스의 도움으로 조영관 혹은 안찰관으로 번역되는 아이딜리스 플레비스의 피선거권 및 최소연령이 기원전 180년 호민관 루키우스 빌리우스 아날리스가 입법해 반포된 빌리아 아날리스 법(Lex Villia Annalis)에 따라 36세 이상만이 출마한 것보다 어릴 때 이 관직을 지냈다고 하며, 이후 매형 아우구스투스의 추천으로 아르발 들판 형제 사제단 사제에 지명됐다. 기원전 15년 집정관으로 추천받아 지냈고, 집정관을 지내기 전후부터 매형 아우구스투스 대신 처남 자격으로 국가 명절 기념으로 열린 축전을 대신 이끌었다.
조카 티베리우스가 제위에 오른 뒤에도 재위 후기까지 생존해 있던 것으로 보이는데, 마지막으로 나오는 기록은 세야누스가 몰락하고 티베리우스가 세야누스 잔당을 고발하면서 터진 공포정치때이다. 이때 드루수스 리보는 티베리우스 친구들에게 모함을 받았는데, 티베리우스 황제가 복수의 화신이 된 나머지 고발만 있어도 처벌받는 정국 속에서도 기소되지 않고 보호를 받았다. 이때 드루수스 리보의 조카인 티베리우스는 외삼촌이 고발됐다는 소식을 받자마자 카프리 섬에서 손수 서신을 보내, 원로원 전체를 소집했다. 그 자리에서 공개된 티베리우스 편지 안에는 황제가 분노하면서 내뱉은 일갈 뒤에, 티베리우스의 보호로 카프리 별궁에 살던 티베리우스 친구들 중 리보를 모함한 이들의 이름이 공개된 다음 혹독한 대가가 따랐다. 그래서 드루수스 리보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려고 한 티베리우스 친구들이 황제에게 역으로 고발당해 반역죄로 모두 처형된 뒤에 그 시체가 테베레 강에 던져졌다. 이때의 일에 관하여 타키투스는 티베리우스가 자신의 외삼촌 드루수스 리보를 모함한 본인 친구들을 손수 고발하면서, 온갖 비난을 퍼붓고, 이들을 사형에 처해달라며 동의를 구할 때 원로원 전체가 오랜 만에 박수를 치고 기립해 환호를 내질렀다고 한다.
그는 딸 리비아 스크리보니아를 비롯해, 이름 미상의 아들들을 뒀다. 이름 미상의 아들의 딸로,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의 손녀 리비아 메둘리나 카밀라는 리비아 드루실라의 손자로 아우구스투스의 외종손이며 양손자 클라우디우스 1세의 신부로 간택됐다. 그러나 결혼 전 요절했다.
[1]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를 본인의 양자로 입양하면서, 사후 공개될 유언장을 통해 죽은 친아들의 양자 겸 상속자 형태로도 입양했다.[2]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가 드루수스 리보를 본인의 양자로 입양한 뒤, 사후 공개될 유언장에 죽은 친아들의 양자 겸 상속자로도 입양한 결과이다.[3] 최근에는 양아들이 아닌, 상속 형태 혹은 호의로 드루수스라는 이름을 받게 된 먼친척 정도로 많이 보고 있다.[4] 기원전 16년 정규 집정관이었으나, 원인 미상의 이유로 중도 사임.[5] 기원전 16년 보결 집정관으로 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