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크레티쿠스 라틴어: Quintus Caecilius Metellus Cretic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조부) 가이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카프라리우스(아버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형제)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형제)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케텔루스(아들) 카이킬리아 메텔라(딸)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69년 |
전임 |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
동기 |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 |
후임 |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퀸투스 마르키우스 렉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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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라치오 인근의 팔레스트리나(Palestrina) 시를 건설했다는 전승이 전해지는 불카누스(Volcanus, 불의 신)의 아들 카이쿨루스의 후예로 전해지는 카이킬리우스 가문의 일원이다. 이 가문은 기원전 3세기부터 로마에서 출세가도를 달려 집정관 계급까지 오른 평민 귀족(노빌레스) 집안으로, 대를 이어 집정관 등 고위 행정관을 역임하며 로마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조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는 기원전 143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과 아카이아 전쟁, 누만티아 전쟁에서 활약했다. 아버지 가이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카프라리우스는 기원전 113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형제로 기원전 68년 집정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와 기원전 69년 법무관을 맡은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가 있었다.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저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의 제국에 대하여>에서 호민관을 역임하고 1년 후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을 맡으며 폼페이우스 휘하에서 활동한 '퀸투스 카이킬리우스'를 언급했는데, 이 인물이 크레티쿠스를 가리킬 가능성이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 기원전 75년 법무관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지만 임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기원전 69년 저명한 웅변가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그는 이 선거에서 가이우스 베레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고 알려졌다. 키케로는 메텔루스가 시칠리아에서 심각한 비리를 저지른 베레스를 일방적으로 비호했다며, 그를 로마에 만연한 부정부패의 원흉이라고 성토했다.
그는 24,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해적들의 소굴인 크레타를 평정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키도니아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뒤 키도니아, 크노소스, 릭투스를 점령하고 고르티나 시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 과정에서 체포된 해적들은 전원 처형되었다. 기원전 67년 크레타 총독으로서 크레타 대부분을 평정한 그는 병사들로부터 임페라토르로 선포되었다. 아테네와 아르고스에서 발견된 그에게 영예를 돌리는 비문은 그가 해적들을 토벌한 것에 대해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매우 높게 평가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편, 로마에서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지중해 전역의 해적을 토벌하기 위해 3년간 모든 지중해와 지중해 해안선의 50마일 이내를 관할하는 임페리움을 부여받았다. 살아남은 크레타인들은 폼페이우스가 사로잡은 자들을 엄벌하기 보다는 자비를 베푼다는 이야기를 듣고 폼페이우스에게 귀순하고자 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폼페이우스는 메텔루스가 크레타에서 맹활약한다는 소식을 듣고 "시기와 질투"를 느끼고 메텔루스에게 전쟁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휘하 레가투스인 루키우스 옥타비우스를 크레타의 새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메텔루스는 폼페이우스에 복종하기를 거부했고, 옥타비우스가 해적과 합류하여 자신에게 대적하자 옥타비우스를 체포한 뒤 모욕과 학대를 가한 후 섬에서 쫓아냈다고 한다. 그 후 두 사람은 서로를 비방하는 서신을 원로원에 보내며 심각한 갈등을 벌였지만, 나중에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임페리움을 가지게 된 폼페이우스가 크레타에 대한 관심을 잃은 덕분에 메텔루스가 총독으로서 계속 군림할 수 있었다.
메텔루스는 크레타 정복을 완료한 뒤 로마의 속주로 삼았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는 그가 미노스의 법을 로마법으로 대체했다고 평했다. 그 후 기원전 63년에 로마로 귀환한 그는 개선식을 거행하는 것을 승인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폼페이우스의 지지자들이 반대한 데다 카틸리나 음모 사건으로 정국이 뒤숭숭했기 때문에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다 기원전 62년 5월 개선식을 승인받고 거행한 뒤 '크레티쿠스(Creticus: 크레타 정복자)'라는 아그노멘을 수여받았다.
그 후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와 함께 폼페이우스를 적대하는 원로원 그룹의 지도자를 맡은 그는 폼페이우스가 동방에서 단행한 정책이 원로원에서 통과되는 것을 강력하게 막았다. 폼페이우스는 이 때문에 자신의 정책을 쉽사리 통과시키지 못하고 자신의 퇴역병들에게 나눠줘야 할 토지도 주지 못해 수년간 전전긍긍하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삼두정치를 맺고 나서야 겨우 뜻을 이룰 수 있었다. 메텔루스는 기원전 60년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로 보내진 사절단의 일원이었으며, 기원전 57년 사제단의 일원이 되었다. 기원전 55년 수석 조영관에 당선되었다가 시민들을 선동해 폭력사태를 조장한 혐의로 고발당한 그나이우스 플란키우스의 처분을 논하는 원로원 회의에 참석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데, 아마도 몇 년 안 되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에게는 삼두정치의 일원인 크라수스의 장남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결혼한 딸 카이킬리아 메텔라가 있었다. 또한 기원전 60년 키케로가 친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검투사 경기를 조직한 인물로 언급된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는 그의 아들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