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 라틴어: Quintus Caecilius Metellus Macedonicus | |
생몰년도 | 기원전 188년 ~ 기원전 115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조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아버지)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삼촌)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삼촌)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칼부스(형제)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발레아리쿠스(장남)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디아데마투스(차남)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삼남) 가이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카프라리우스(사남) |
참전 |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 아카이아 전쟁, 누만티아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43년 집정관 |
전임 |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
동기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
후임 |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칼부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세르빌리아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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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감찰관.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과 아카이아 전쟁, 누만티아 전쟁에서 활약했다.2. 생애
라치오 인근의 팔레스트리나(Palestrina) 시를 건설했다는 전승이 전해지는 불카누스(Volcanus, 불의 신)의 아들 카이쿨루스의 후예로 전해지는 카이킬리우스 가문의 일원이다. 이 가문은 기원전 3세기부터 로마에서 출세가도를 달려 집정관 계급까지 오른 평민 귀족(노빌레스) 집안으로, 조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는 기원전 251년과 기원전 247년에 집정관을 맡았으며, 파노르무스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아버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는 기원전 206년 집정관이었고 삼촌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는 기원전 206년 법무관을 역임했으며, 또다른 삼촌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는 기원전 213년 호민관을 역임했다. 형제로 기원전 142년 집정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칼부스가 있었다.그는 기원전 168년 20세의 나이에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휘하에 들어가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활약했다. 피드나 전투에서 마케도니아군이 결정적으로 패한 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와 함께 로마에 파견되어 승전보를 전했다. 그 후 20년간 행적이 전해지지 않았다.
기원전 148년 법무관에 선출된 후 자신을 마케도니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 페르세우스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며 로마에 반기를 든 안드로니코스를 토벌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의 군대는 피드나에서 안드로니코스를 결정적으로 물리쳐 25,000명의 마케도니아인과 트라키아인을 사살하고 트라키아로 도망쳤다가 새 병력을 규합하여 다시 도전해온 안드로니코스를 물리치고 안드로니코스를 생포하여 로마로 보낸 뒤 마케도니아 왕국의 옛 영토와 에페이로스, 나부 일리리아, 이오니아 제도를 포함하는 마케도니아 속주를 조직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기원전 146년 아카이아 동맹이 로마에 반기를 들면서 아카이아 전쟁이 발발하자, 아카이아 동맹의 스트라테고스인 크리톨라오스가 포위한 로마의 동맹시 헤르클레아 트라친스카를 구원하기 위해 남하했다. 로마군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상상도 못했던 크리톨라오스는 급히 엘라테아로 후퇴하다가 스카르파에파(Skarfaefa)에서 따라잡혀 전군이 궤멸되고 자신 역시 목숨을 잃었다. 이후 메텔루스는 군대를 겨울 숙영지에 배치하고 날이 개는 즉시 코린토스로 향하기로 했다. 한편, 디아에오스가 이끄는 1,000명의 아카이아군은 크리톨라오스를 돕기 위해 북상했다가 크리톨라오스가 참패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뿔뿔이 흩어졌고, 엘리스와 메세네 등 여러 도시가 로마군에 귀순했다.
메텔루스는 군대를 겨울 숙영지에 휴식시킨 뒤 날이 개자 보이오티아로 진군하면서 병사들에게 사원이나 개인 주택을 파괴하지 않고 누구든 죽이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후 코린토스로 진격해 자기 선에서 전쟁을 끝내고 공적을 독차지하려 했지만, 기원전 146년 여름 이탈리아에서 군대를 이끌고 온 집정관 루키우스 뭄미우스 아카이쿠스로부터 마케도니아로 돌아가라는 통보를 받고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그 후 뭄미우스는 아카이아 동맹의 중심지인 코린토스를 제압하고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거나 노예로 삼고 예술품들을 모조리 약탈해 로마로 가져갔다. 메텔루스는 이탈리아로 돌아간 뒤 마케도니아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에 따르면, 그는 군사적 역량이 뛰어났지만 지극히 보수적이고 평민들을 편협하게 대해서 인기가 없었고, 이로 인해 집정관 선거에서 두 번 낙선했다고 한다. 로마에서는 집정관 선거에서 3번 떨어진다면 정치 경력이 끝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럼에도 그는 기원전 144년에 집정관 선거에 다시 출마해 기원전 143년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메텔루스는 누만티아 전쟁이 한창한 히스파니아 속주에 파견되어 3만 병력을 이끌고 아레바키족에 대항했다. 그는 2년간 작전을 수행하며 아레바키족을 연이어 격파했지만, 누만티아 공략에 실패했다. 이에 그들과 협상한 끝에 인질, 의복, 말 등 공물을 바치고 무기를 인도하는 대가로 로마의 친구이자 동맹 부족이 되는 협정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누만티아인들은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이유로 끝내 무기를 인도하지 않았고, 로마는 누만티아 같은 작은 도시가 자신들에게 복종하지 않은 것에 격분해 재차 전쟁을 벌이기로 했다. 메텔루스는 이탈리아로 귀환한 뒤 아레바키족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
그는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와 정치적 연대를 맺고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치열한 정쟁을 벌였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를 속주민들에게 심각한 수탈을 가한 혐의로 고발하자, 그는 코타를 변호해 무죄 판결을 얻어냈다. 이후 그가 기원전 141년 집정관이자 스키피오의 파벌에 속한 퀸투스 폼페이우스를 뇌물 수수 혐의로 고발했지만, 폼페이우스도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에도 로마 정계는 메텔루스 파벌과 스키피오 파벌간의 정쟁으로 인해 몸살을 앓아야 했다.
기원전 133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페르가몬 왕국의 아탈로스 3세가 최근에 사망하면서 로마에 물려준 막대한 재산을 민회의 관리하에 두어서 평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토지개혁을 실행할 자금으로 충당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원로원이 마땅히 모든 국가 수입을 관리해야 하는데 민회에게 임의로 돌릴 수는 없으며,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평민들의 환심을 사서 왕이 되려는 야욕을 품었기 때문에 이런 제안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 후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호민관 임기가 끝나면 곧바로 고발하려는 원로원의 계획을 눈치채고 호민관 재선을 감행하려 했다가 스키피오 나시카가 이끄는 무뢰배들의 습격으로 피살되었다.
기원전 131년, 그는 퀸투스 폼페이우스와 함께 감찰관이 되었다. 평민 출신이 2명의 감찰관 직위를 독차지한 것은 로마 공화국 역사상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로마의 인구를 증가시키기 위해 모든 시민이 자녀를 가질 목적으로 결혼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이를 위반하는 자들은 막대한 벌금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아내를 여태 두지 못한 홀아비와 결혼할 생각이 없던 청년들이 격분했고, 호민관 가이우스 아티니우스 라베오는 민심을 혼란에 빠뜨린 죄를 물어 절벽에 내던져 죽이자고 요구했지만 다른 호민관들이 거부권을 행사한 덕분에 이뤄지지 않았다.
기원전 129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사망하자, 오랜 정쟁을 벌였던 사이였지만 이번만큼은 아이밀리아누스의 죽음을 공개적으로 애도하고 자식들에게 장례식에 참여하도록 지시했다. 기원전 115년경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장남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발레아리쿠스는 기원전 123년에 집정관을 역임했고, 차남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디아데마투스는 기원전 117년에 집정관을 역임했고, 삼남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는 기원전 115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사남 가이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카프라리우스는 기원전 113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 이름이 카이킬리아인 두 딸이 있었는데, 각각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와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