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라틴어: Gaius Calpurnius Piso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180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1]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조부)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아버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형제) 호스틸리아 콰르타(아내)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의붓 아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80년 |
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마르쿠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 |
동기 |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루스쿠스 |
후임 |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루스쿠스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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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로마의 전설적인 두번째 왕 누마 폼필리우스의 아들 칼푸스를 시조로 둔 노빌레스 집안인 칼푸르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 모두 가이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학자들은 기원전 211년 법무관이었던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가 그의 아버지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형제로 기원전 198년 레가투스를 역임한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가 있었다.기원전 186년 법무관에 선임되어 먼 히스파니아 속주를 다스렸다. 그는 가까운 히스파니아 총독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와 함께 카페타니족을 공격했다. 처음에는 톨레도 인근에서 패배했지만, 타구스 강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그가 기병대를 친히 이끌고 적군의 측면을 요격해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이후 총독으로서 수년간 먼 히스파니아 속주를 다스린 그는 크리스피누스와 함께 로마에 군대와 함께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기원전 184년 법무관인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와 아울루스 테렌티우스 바로의 반대에 부딪쳐 결국 실패했다. 이후 로마에 홀로 돌아온 뒤 루시타니아인과 켈티베리아인들을 대상으로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는 개선식을 거행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개선식에 전시된 전리품은 83개의 황금 화환과 12,000파운드 상당의 은이었다고 한다.
기원전 181년 기원전 184년 집정관을 역임했던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기원전 182년 법무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이스트라와 함께 에트루리아의 그라비스카 시를 건설하는 임무를 맡은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기원전 180년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루스쿠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고, 동료 집정관과 함께 리구리아로 부임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는 취임 직후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의붓 아들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가 보결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플라쿠스의 어머니이자 피소의 아내였던 호스틸리아 콰르타는 자기 아들이 집정관 선거에서 피소에 밀려 낙선한 것에 앙심을 품고 피소를 독살했다. 이 사실이 발각되면서 법정에 기소되어 처벌되었지만, 플라쿠스는 그럼에도 집정관으로 남았다고 한다.
아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는 기원전 148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인물이 카이소니우스 씨족 가문에서 입양된 피소 가문 사람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그의 코그노멘 뒤에 붙은 카이소니누스는 입양된 사람에게 붙여진 사람들이 쓴 '-anus' 형태의 '카이소니아누스'가 아니다. 따라서 이 주장은 소수에게만 인정받고 있다. 게다가 피소 가문 일원들은 이 사람처럼 외가 성씨 뒤에 이렇게 변환해 대대로 물려받아 쓰거나, 다른 이유로 이렇게 이것을 물려받아 피소 가문 내에서 다시 지파를 구분한 특징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