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페틸리우스 스푸리누스 라틴어: Quintus Poetillius Spurin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176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발리스타 |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퀸투스 페틸리우스 스푸리누스(조부) 가이우스 페틸리우스 스푸리누스(아버지)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76년 |
전임 |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대 그라쿠스 |
동기 |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히스팔루스→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 |
후임 |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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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플레브스 가문인 페틸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는 퀸투스, 아버지는 가이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는 기원전 190년 재무관을 맡았고, 기원전 187년 호민관에 선임되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그의 친척인 퀸투스 페틸리우스 스푸리누스도 그와 함께 호민관을 맡았다고 밝혔지만, 현대의 여러 학자들은 플루타르코스 등 고대의 많은 학자들은 단 한 명의 페틸리우스만 언급한 점을 근거 삼아 '호민관 퀸투스 페틸리우스 스푸리누스'는 단 한 명이었다고 추정한다.그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를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주 안티오코스 3세가 선불금으로 제시한 돈을 횡령했다고 고발했다. [1] 루키우스가 호민관의 고발에 해명하려 할 때, 스키피오가 개입했다. 폴리비오스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원로원의 누군가가 그에게 평화 조약이 체결되기 전에 안티오코스로부터 받은 돈을 군대의 급여를 지불하기 위해 사용한 내역을 요구했다. 푸블리우스는 자신이 보고를 받았지만 누구에게도 보고할 의무는 없다고 답했다. 적들이 청구서를 보여달라고 고집하자, 푸블리우스는 형제에게 청구서를 가져오라고 요청했다. 청구서가 전달되자, 푸블리우스는 그것을 의원들에게 보인 뒤 모든 사람 앞에서 찢고 정적들에게 그것을 단편적으로 다시 작성하라고 권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왜 그리도 3천 달란트를 누구에 의해 썼는지에 대한 청구서를 찾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안티오코스에게서 받은 15,000달란트를 어떻게, 누구를 통해 받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아시아, 리비아, 이베리아의 주인이 되었는지 묻지 마시오."
이 말에 모든 원로원 의원은 할 말을 잃었고, 보고를 요구하는 사람은 침묵했다.
"안티오코스에게서 받은 15,000달란트를 어떻게, 누구를 통해 받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아시아, 리비아, 이베리아의 주인이 되었는지 묻지 마시오."
이 말에 모든 원로원 의원은 할 말을 잃었고, 보고를 요구하는 사람은 침묵했다.
기원전 181년 로마 시내의 재판을 관장하는 법무관에 선임되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당시 피타고라스 철학에 관한 문헌 모음인 누마 폼필리우스의 책이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는 이것을 읽은 뒤 이 책이 고대부터 전해져온 의식을 훼손한다고 간주하고 불태우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기원전 176년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히스팔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된 뒤 로마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리구리아인들을 토벌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런데 스키피오가 취임 직후 사망했기 때문에 보결 집정관 선거를 이끌어야 했다.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가 보결 집정관에 선임된 뒤 여름이 되어서야 리구리아로 향했고, 발리스타 시 인근에서 첫번째 전투를 치렀다. 전투 자체는 승리했지만, 그는 부주의하게 대열 앞에 서 있다가 적병이 내지른 창에 찔려 전사했다.
[1] 리비우스는 500달란트라고 밝혔고, 폴리비오스는 3천 달란트라고 기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