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 라틴어: Lucius Calpurnius Piso Frugi | |
생몰년도 | 기원전 177년 ~ ?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미상 |
지위 | 평민 귀족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조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아버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아들) |
참전 | 제1차 노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33년 |
전임 |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
동기 |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
후임 | 푸블리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 푸블리우스 루필리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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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2세기 중반에 활동했던 로마 공화국의 정치인, 역사가. 로마 연대기를 저술했다.2. 행적
기원전 177년경 로마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속한 칼푸르니우스 씨족은 로마의 두번째 왕인 누마 폼필리우스의 아들인 칼푸스의 후손으로 알려진 평민 집안이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각각 루키우스와 가이우스를 이름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들의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기원전 149년 호민관에 선임된 그는 루시타니아 전쟁 때 귀순하면 땅을 골고루 분배해주겠다고 속여서 9,000명의 루시타니아인들을 함정으로 유인한 뒤 집단 학살해버린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를 동료 호민관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와 함께 고발했다. 그러나 갈바에게는 막강한 집안 배경이 있었기에, 결국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그는 향후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로마의 국제적 명성을 더럽힐 거라면서, 이를 막기 위해 속주민을 갈취한 총독들을 심판하는 법안을 제출해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지방 법무관이 법원을 지휘하고 원로원이 배심원을 선택한다고 규정했으며, 유죄 판결을 받은 총독은 착취한 금액을 상환해야 했다.
기원전 138년에서 136년 사이에 법무관으로서 시칠리아 지역을 배정받았다. 기원전 135년 시칠리아에서 제1차 노예 전쟁이 발발하자, 토벌군을 이끌고 반군과 맞섰으나 크게 패하고 본진마저 빼앗겼다. 기원전 133년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어 시칠리아를 배정받고 재차 노예 반군과 맞섰다. 그는 군대의 규율을 회복하고 모르간티아 요새를 함락하여 9,000명의 노예를 살육했다. 이후 반란의 진원지인 엔나 공략에 총독 마르쿠스 페르페르나에게 맡기고, 자신은 시칠리아의 다른 지역을 수복했다. 헤나는 기원전 132년 후임 집정관인 푸블리우스 루필리우스에게 공략되었고 제1차 노예 전쟁이 종결되었다.
그는 곡물법과 농지법을 주창한 그라쿠스 형제의 가장 단호한 반대자였다. 키케로는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제기한 곡물법이 통과된 뒤 값싼 곡물을 받으러 나온 무리 중에 그도 있었다고 기술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어째서 곡식을 사러 왔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당신이 모든 사람의 권익을 공유하는 걸 전혀 원하지 않소. 그러나 당신이 그것을 취했기 때문에, 나는 내 몫을 얻으려 하오."
그는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지지자들이 피살당한 이듬해인 기원전 120년 감찰관에 선출되었다. 감찰관으로서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라쿠스의 잔당이 로마에서 준동하는 걸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말년에 아이네이아스의 이탈리아 상륙부터 자신의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로마 연대기 7권을 저술했으나 원본은 소실되었고, 단지 49개의 짧은 인용문만 전해진다. 제1권엔 신화 시대와 로마 왕국의 역사를 다뤘고, 2권은 로마 공화국의 출범과 기원전 396년 베이 함락, 기원전 390년 브렌누스의 로마 약탈과 같은 사건들을 다뤘다. 나머지 4권은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아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는 기원전 112년 법무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