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켈트 갈리아족의 한 부류인 세노네스족의 족장
Brennus
생몰년도 미상
기원전 390년에 갈리아족은 많은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지금의 이탈리아 쪽에도 진출하여 포강 유역의 에트루리아 도시국가들을 파괴하고 중부 이탈리아로 전진하여 이 와중에 에트루리아의 도시인 클루시움을 공격하였다.
이 때문에 클루시움에서 로마에게 갈리아 사람들을 쫓아내달라고 지원을 요청했으며, 로마가 설득하여 나가달라는 요청을 했으나 이를 거절한다.
로마에서 설득하러 온 대사들 중에 한 명인 누메리우스 암부스투스 파비우스가 전투에 참가하자 일개 대사가 전투에 참가해서 모든 나라의 법률을 깨뜨렸다는 데 분노해 클루시움의 포위를 풀고 로마로 진군하여 알리아 전투에서 로마군을 격파하고 그 지역들을 약탈하면서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했으며 수도인 로마를 점령했다.
로마 점령 후에 일부 로마 시민이 있던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공략하다가 실패하자 야음을 틈타 올라가다가 거위가 자꾸 울어대서(...) 이를 알아차린 로마 병사들이 켈트 병사를 차례로 죽였으며,[1] 켈트인들은 로마로부터 전쟁 배상금을 받고 퇴각하기로 했는데 브렌누스가 자신이 가지고 온 엉터리 천칭으로 로마인에게 금의 중량을 산정하도록 강요했다.[2]
이에 로마의 호민관이 항의하자 저울추 그릇에 자신의 칼을 올려놓으면서 "패자는 비참하도다!(Vae victis, Woe to the Vanquished)"라고 비웃으면서 무게를 줄이는 놈은 죽일 것이라고 위협했으며, 이에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가 분노해서 그를 공격했다. 카밀루스의 마니풀리 대형의 방어와 야습 등으로 두 차례 패배한 데다가 도시전에서도 패배하였기 때문에 로마에서 철수한다.[3]
한편 이때 브렌누스의 침공으로 인해 로마의 각종 기록들이 손실되어서, 기원전 390년 이전의 로마의 역사는 신화와 역사를 구분하기가 매우 힘들어졌다고 한다.
1.1. 등장 매체
1.1.1. 시드 마이어의 문명
- 문명 3: 켈트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1.1.2. 도미네이션즈
브렌누스의 할슈타르 단지가 유물로 등장한다.2. 동명이인의 갈리아족이며 켈트족 지도자
둘 다 켈트족 지도자인 데다 로마, 그리스를 털어먹어서 동일인으로 착각되기도 하지만 고대에 켈트족은 프랑스 및 갈리아부터 북이탈리아, 이베리아 반도의 히스파니아, 브리튼 섬의 브리타니아 중부, 동부 유럽, 심지어 튀르키예 한가운데까지 퍼져 살았다.111년 후인 BC 279년 1월 수천 명의 켈트족 전사들을 이끌고 마케도니아 왕국을 침공하여 마케도니아 국왕인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Ptolemy Ceraunus)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을 쳐부수고 케라우누스를 붙잡아 목을 잘라 죽여 버렸다.[4]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남쪽의 테르모필레[5]에서 그리스군을 격파하고 델포이 신전을 털어먹은 것으로 알려졌다.[6]
부하들과 함께 다뉴브 강을 건너 기원전 279년 여름에 그리스를 침공했으며, 이때 2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왔다고 알려졌지만 연대기 작가들의 특유의 과장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스에서 스페르케이우스의 교량을 파괴해 진격하는 것을 막으려고 하자 방패를 이용해 거친 급류를 건너면서 여러 곳에서 약탈을 했다.
그러나 약탈을 하는 사이에 그리스군은 병력을 집결할 수 있었으며, 그리스군과 전투를 했다가 불리하자 후퇴했다. 몇 주 후에는 기병을 보내 아이톨리아 지역을 약탈해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아이톨리아 출신의 그리스 병사들을 분산시킬 수 있었으며, 일부 목동들의 협조를 받고 테르모필레 인근의 비밀 통로로 안내받아 그리스군을 포위해 격파했다.
그리스군을 격파하자 남쪽으로 진군해 델포이 신전을 약탈했으며, 돌아가던 도중에 그리스군과의 교전에서 상처를 입고 사망했다.
게임 문명 4에서 부디카와 함께 켈트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1] 이로써 거위는 신조로써 로마의 국조급 위치로 격상되었다. 반면 이때 짖지 않았던 개들은 비교적 천시되었다.[2] 저울의 눈금을 대놓고 조작하다가 나중에는 저울을 그냥 흔들어 버렸다고 한다(...).[3] 단 로마인들의 기록에서는 애초에 패배를 숨기려는 흔적이 역력하게 보이기 때문에 갈리아족이 패배하는 과정에서는 자료의 신빙성이 의심스러운 면도 있다. 현대 연구자들은 이름높은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가 이런 일에 상습범이었다고 지목하고 있다. 역사가가 아니라 역사왜곡가[4] #1, #2[5] 영화 300의 배경이 되었던 테르모필레 전투의 그 테르모필레다. 여기도 배신자가 돌아가는 길을 알려줬다. 과연 테르모필레는 배신의 땅인가.[6] 이 사건에 대해 그리스의 지리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스트라보는 "켈트족들이 델포이 신전을 약탈하려 하자, 아폴론신이 직접 나타나서 켈트족들한테 천둥과 우박을 퍼부었고 이를 본 켈트족들은 신의 노여움을 사서 천벌을 받았다고 여겨 신전을 약탈하지 못하고 달아났다."라고 기록했으나 그로부터 170여 년 후인 기원전 105년 갈리아 남부의 톨로사(Tolosa) 마을에서 로마 장군 카에피오(Caepio)가 켈트족들이 델포이 신전에서 약탈해서 가져온 엄청난 양의 황금을 발견했다는 내용을 감안한다면, 아무래도 그리스인인 스트라보는 그리스인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델포이 신전이 야만족인 켈트족들한테 몽땅 털린 일을 부끄럽게 여겨 신이 벌을 주어 쫓아냈다는 식으로 역사왜곡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