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라틴어: Lucius Quinctius Flamininus | |
생몰년도 | 기원전 230년 ~ 기원전 170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조부)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아버지)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동생)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92년 |
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룰라 퀸투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 |
동기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
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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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동생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총사령관으로서 활약했을 때 해군 지휘관을 맡았으며, 동생의 지원에 힘입어 집정관까지 올랐다. 그러나 기원전 184년 감찰관에 선임된 대 카토에 의해 원로원에서 제명되었다.2. 생애
고대 로마의 명문 귀족 가문인 퀸크티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퀸크티우스는 '다섯번째'를 뜻하는 퀸투스(Quintus)에서 유래했다. 기원전 471년 티투스 퀸크티우스 카피톨리누스 바르바투스가 처음으로 집정관에 취임한 이래, 이 가문에서 여러 집정관이 선출되었다. 조부는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이고 아버지는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였는데, 두 사람이 어떤 공직을 맡았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기원전 208년 집정관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는 그의 사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생으로 기원전 229/228년에 출생한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있었다.기원전 213년 푸블리우스 푸리우스 필리우스가 사망한 뒤 공백이 생긴 사제단의 일원으로 발탁되었다. 기원전 201년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와 함께 조영관에 선임되었다. 그들은 웅장한 검투 경기 및 서커스를 조직하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아프리카에서 가져온 수많은 곡물을 시민들에게 싼 가격에 나눠줬다. 이리하여 인기를 끌어모은 그는 기원전 200년 법무관에 선임되었다. 기원전 198년 집정관에 오른 동생 티투스가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출진했을 때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로 발탁되어 육군을 수송하고 해상 작전을 수행할 함대를 지휘했다.
원정군이 펠레폰네소스 반도에 도착한 뒤, 동생 티투스가 육군을 이끌고 마케도니아로 북상하는 동안 피레우스의 주둔한 로마 함대를 이끌고 로마 편에서 전쟁에 참여한 페르가몬 왕국과 로도스의 함대와 임을 합쳐 에우보이아의 에레트리아를 포위했다. 지역 주민들은 페르가몬 왕국의 아탈로스 1세와 평화 협상을 벌였지만, 로마군은 갑작스러운 야간 공격으로 도시를 함락시키고 약탈을 자행했다. 이때 이 도시에 있던 많은 예술 작품들이 로마로 이송되었다. 이후 카리스투스 시로 진군해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항복을 받아냈다.
뒤이어 마케도니아 왕국과 연합한 아이톨리아 동맹의 중심지인 코린토스를 포위하던 중 아카이아 동맹군과 합세했다. 그럼에도 도시 내 코린토스인과 마케도니아 수비대는 강력하게 저항했다. 여기에 필리클레스 장군이 이끄는 마케도니아 병사 1,500명이 코린토스에 추가로 입성하면서 도시 공략은 더욱 요원해졌다. 그는 끝까지 공세를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연합국 장성들이 철수를 권고하자 어쩔 수 없이 포위를 풀기로 했다. 이후 코르푸에서 겨울을 보낸 그는 기원전 197년 초봄에 아티카에서 동생 티투스를 태우고 시키온으로 가서 페르가몬 국왕 아탈로스 1세, 아카이아 동맹의 스트라테고스인 니코스트라토스, 스파르타 국왕 나비스 등과 만나 회담을 가졌다.
기원전 197년, 원로원은 퀸크티우스 형제에게 마케도니아에서 군대를 지휘할 권한을 1년 연장하기로 결의했다. 그는 여전히 마케도니아를 지원하는 아카나니아를 제압하기로 하고, 레우카스에서 아카마니아 대중 회의를 소집한 뒤 마케도니아와 동맹을 끊고 로마와 손을 잡으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레카다 시가 이를 따르지 않고 마케도니아를 계속 지지하자, 즉시 군대를 이끌고 습격해 빠른 시일 내에 공략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며칠 후, 티투스가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국왕 필리포스 5세를 상대로 완승을 거둔 뒤 필리포스 5세가 로마가 원하는 대로 평화 협약을 맺기로 하면서,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막을 내렸다.
그는 기원전 194년 초까지 그리스에 남아있었다. 기원전 195년 아카이아 동맹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로마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스파르타 국왕 나비스를 응징하는 원정에 가담해 40척의 함대를 이끌고 라코니아 해안을 장악하고 페르가몬, 로도스 함대와 함께 귀티움 시의 해군 기지를 봉쇄했다. 그러나 주민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큰 손실만 볼 뿐 공략에 애를 먹다가, 4,000명의 강력한 분견대를 이끌고 온 티투스 덕분에 도시 공략에 성공했다. 이후 동생이 스파르타를 포위 공격할 때 참여했고, 나비스가 로마가 제시한 조건에 따라 평화 협약을 맺기로 한 뒤 로마로 돌아갔다. 동생이 마케도니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적을 인정받아 개선식을 거행했을 때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92년 동생 티투스의 지원에 힘입어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이후 제비뽑기 결과에 다라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를 배정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리구리아인들과 전쟁을 벌였다고 전해지나 결과가 어땠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분명하지 않다. 그 해 연말에 고위 행정관 선거를 조직하기 위해 로마로 돌아왔고, 기원전 191년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임무를 맡은 집정관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의 레가투스로 플라쿠스, 대 카토와 함께 발탁되었다. 그가 이 원정에서 어떤 활약을 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단지 기원전 188년 전쟁이 끝난 뒤 로마로 돌아갈 수 있었다는 것만 전해질 뿐이다.
기원전 184년 감찰관에 선임된 대 카토와 플라쿠스는 7명의 원로원 의원을 자격 미달을 이유로 제명했다. 이때 그 역시 이들과 함께 쫓겨났다. 고대 역사가들은 그가 제명된 원인에 대해 다양한 설명을 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그가 갈리아 키살피나에서 활동할 때 개인적으로 아꼈던 '남첩' 필리푸스를 데려갔다. 얼마 후 필리푸스가 로마를 떠나서 검투사들의 경기를 볼 수 없다며 불평하자, 그는 필리푸스의 앞에서 직접 보이족의 고귀한 신분이었으나 로마에 체포된 뒤 옥살이를 하던 중 탈욕했다가 체포된 이들의 목을 직접 베었다. 발레리우스 안티아스에 따르면, 그가 사람들이 참수당하는 것을 이제껏 본 적이 없는데 지금 보고 싶다며,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던 범죄자 한 명을 데려와서 도끼로 직접 쳐 죽였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여느 연회 때 정부가 검투사 경기를 볼 수 없어서 매우 불편하다며 불만을 제기하자, 그는 사형 선고를 받은 범죄자를 데려오게 한 뒤 릭토르를 시켜 참수했다고 한다.
카토는 루키우스의 이같은 행위를 전하면서 그가 원로원 의원으로 남아있기엔 지나치게 가혹하고 품위가 떨어지니 원로원에서 제명해야 한다고 주장해 관철시켰다. 루키우스는 동생 티투스와 함께 민회에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이후 연극 공연 중에 청중이 맨 뒤 구석에 앉아있는 그를 발견하고 맨 앞줄에 앉은 역대 집정관들에게 자리를 바꾸라고 촉구했다. 이에 집정관들은 그에게 자리를 내주었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으며, 기원전 170년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